슬픈 걸 봤는데 재밌다고?

by 이백구십일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라, 이걸 재밌다고 표현해도 되는 건가? 가장 처음 그런 생각을 가졌던 건 영화 도가니를 봤을 때였다. 나는 영화를 보며 강하게 몰입했고, 많은 감정과 생각을 느꼈다. 인상적인 장면과 분위기가 많았고, 화가 많이 나기도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영화를 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거고,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냐 하면 그렇다 정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어때? 재밌었어?


아마 친구의 의도는 즐겁고 유쾌하냐, 라는 뜻은 아니었을 거다. 그냥 그 영화가 볼만한지 추천할 수 있는 정도의 영화인지 알고 싶었던 거겠지.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하려다가 재미라는 단어가 가시처럼 걸렸다. 이걸 재밌다고 표현해도 되는 건가? 그런 성격의 영화가 아닌데.


사실 저 영화로 인해 이런 고민을 했고, 생각했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답했었는지는 희미하다. 아마 재밌다고 답하지는 않았을 거다. 너무 화나는데 그래도 한 번쯤 보는 건 좋을 것 같아. 그 정도 말이 아니었을까. 추측이다.


그 후로도 한 번씩 재미, 라는 단어는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걸 재밌다고 해도 되는 건가? 아니, 확실히 흥미롭게 보긴 했는데. 인상적이긴 했어. 몰입도 됐고, 본 게 후회되지 않아. 좋았어. 그런 말들이 가끔 그냥 재밌다. 로 뭉뚱그려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슬픈 드라마를 보고 재밌다고 말해야 하거나. 끔찍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을 보고 재밌다고 하려 할 때면 멈칫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별생각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 걸려 넘어진 적이 있는 생각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의식하게 됐다. 어린 날의 어느 때에는 친구가 재밌다고 할 때 지적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너는 그게 재밌어? 신나고 유쾌하고 즐겁다고? 사이코패스야? 친구가 뭐라고 했더라. 또 시작이네?


물론 지금은 나 혼자만의 기준이고, 사람들이 그런 의도로 모든 걸 재밌다고 하는 게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는 재밌다는 말을 다른 단어로 우회하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과 저런 점이 좋더라. 인상 깊더라. 물론 가끔 생각 없이 그냥 재밌다고 할 때도 많다.


최근에도 브런치에서 어떤 글을 흥미롭게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재밌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게 재밌는 내용이 맞나?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이걸 왜 재밌다고 느꼈지? 아, 정확하게는 재밌는 게 아니라 흥미로웠던 거지? 근데 흥미는 재미랑 다른 거 맞지? 알고 보면 사전적으로는 같은 뜻인 거 아니야?


미묘하게 다른 뜻이라는 건 알지만 정확한 뜻까지는 새겨 넣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이 글 쓰다 잠깐 검색하고 왔다. 재미는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흥미는 관심이나 호기심이 가는 것. 이란다. 대체해서 쓰기 좋은 게 맞았네.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그래서 슬픈 걸 봤을 때, 잔혹한 범죄의 추리극을 봤을 때. 내가 즐거움을 느꼈나? 하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남이 슬픈 게 즐겁다거나, 범죄를 보고 즐거움을 느꼈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낀 거지. 그렇다고 한다면 또 재밌다고 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건가? 근데 슬픈 거 보고 재밌다고 하거나, 범죄물 보고 재밌다고 하면 좀 미묘한 느낌이 드는데.


가끔 보면 언어와 표현이라는 건 참 어렵다. 뭐, 대부분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나도 가끔 친한 사이면 볼멘소리 정도는 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런 경우는 드물긴 하다. 뜻만 통하면 되지 뭐. 근데 글 쓰면서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가져도 되나? 모르겠다. 생각이 돌고 돈다. 어차피 내 멋대로 쓰는 건데, 뭔 상관이냐 싶기도 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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