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써야 할지 모르겠는 나의 재능

by 이백구십일

고민하던 문제에 결론을 얻고,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웹소설 말고 무엇을 해볼 것인가.

그러다 에세이에 생각이 미쳤다.

사실은 AI가 추천해 준 것들 중 하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진짜 생각이 많은 편이다.

뭔가를 보거나 마주쳐서 생각하게 될 때도 있지만, 그냥 멀쩡히 밥 먹다가 자다가 씻다가도 불쑥 흑역사나 이런 게 떠올라 악! 소리를 지른다.

어떤 흑역사는 반복적으로 떠올라서 내가 대체 왜 그랬지?! 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답도 없고 이미 지난 일이고 스트레스만 받으니 금방 흩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한 번 치기도 하고, 빨리 뭔가 다른 행동을 하려 한다.


어떨 땐 좀 불편하지만, 에세이를 쓰기에는 생각이 많은 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미 내 안에 많은 고민, 혼재된 생각들.

그런 것들을 그저 풀어내고 적어내기만 해도 에세이가 아닐까?


물론 좋은 에세이, 사람들이 좋아할 에세이면 좀 더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뭔가를 한다.

그것에 집중해 보려 한다.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고.

어떤 성과를 얻으려 발버둥 치지 말고.

그냥 이 순간 몰입해서 뭔가 하는 것.

딱 그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기에 에세이는 꽤 좋은 수단 같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게 쉽고 편했다.

뭔가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멋들어지게 쓰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퀄리티에 상관없이 뭐든 어느 정도 길이로 자유롭게 써 봐라.

하면 별 고민 안 하고 아무 말이나 시작해서 줄줄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생각을 그냥 펼쳐내고 풀어내는 게 꼬맹이 때부터 익숙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가치 있는 문장들은 아니었겠지만, 독후감 숙제에는 유용했다.

다른 애들은 페이지 채우기가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난 그냥 펜을 잡고 쓰기만 하면 같은 말을 빙빙 돌려서라도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떨 땐 독후감인데 책 읽기가 귀찮아서 표지와 저자 소개, 목차 정도만 보고 해치운 적도 있었다.


어디선가 이렇게 쉬운 걸 남들은 왜 못 하지?

그렇게 생각되는 게 바로 본인의 재능이라고 하는데.

주절주절 늘어놓는 거, 그게 내 재능이라면 재능일 수 있겠다.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꼬맹이 때였는데,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인 애가 노트에 소설을 끄적이는 걸 봤다.

그게 재밌고 멋져 보여서 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때는 작가가 꿈이기도 했다.


웹소설 쓰다 그랬듯, 그때도 초반부만 끄적거리다 포기하곤 했는데.

그때는 큰 죄책감도 없었고.

그냥 그때그때 무언가를 써나간다는 게 재밌었다.


그러다 한 번은 한 권 분량을 채워 투고를 해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출판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긍정적인 응원과 칭찬을 받아, 친구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흔하고 관용적인 탈락 위로 문구였던 것 같지만.

그땐 어리고 순진해서 마냥 기뻤다.


멋모르던 때라 그때는 뭘 쓰기만 하면 인터넷에 연재했었는데.

별 반응을 얻진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냥 뭐든 쓰는 게 좋고 즐거웠다.

그렇게 계속 뭐라도 써 내려갔다면 좋았을 텐데.

군대에 가면서 환경이 변했다.


나에게 군대는 매우 끔찍한 곳이었다.

외동으로 혼자 자유롭게 자랐기 때문인지.

나는 유독 나를 억압하고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 취약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사실 군대에 가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가야 할 곳이고, 가면 또 죽지 못해 살면서도.

어쨌든 시간이 가고 끝이 나겠지 싶었다.


실제로 겪어보니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생각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물론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가서인지 나는 그럭저럭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들었다.

전에는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던 책도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뭔가를 쓰는 건 물론 읽는 것조차 너무 버거워서 하지 않았다.


제대 후 다시 자유를 찾고도 멀어진 글과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나서 그러지 않는 게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읽지 않은 게 하도 오래돼서 이제는 뭔가 읽고 싶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뭔가를 쓰는 건 어차피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니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웹소설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읽고 쓰기 시작했지만.

전처럼 재밌게 쓸 수는 없었다.

이젠 너무 많은 경험과 생각들로 그저 쓰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조금씩 글 쓰는 게 재밌어졌다.

웹소설을 쓸 때 특히 부담을 느꼈던 수백 편을 써야 한다는 압박.

그게 사라지자, 키보드 앞에 앉아 글을 시작하는 과정이 전혀 괴롭지 않았다.

일정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벗어나자 비로소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잘 모르는 분야다 보니, 새롭게 느껴져서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웹소설을 쓸 때는 어떻게든 더 잘 쓰고 싶고, 성과를 내고 싶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렸는데.

에세이를 쓸 때만큼은 욕심을 부리지 않기 위해 애써볼까 한다.


에세이로 뭔가를 이루려는 욕심은 좀 접어두고.

그저 응어리진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고, 고민을 덜어놓고 정리하는 정도.

이 정도만 해도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욕심을 완전히 놓지는 못해 일기가 아닌 브런치에 적히고 있지만.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이보단 훨씬 불성실했을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단 생각이 든다.

그간 나는 누가 취미를 물으면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적당히 얼버무리곤 했는데.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취미는 에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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