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여정. 글쓰기 훈련
최근 들어 패션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옷들을 서로 맞대가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던 탓이었을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무튼 패션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신만의 답을 내고 싶어졌다.
패션은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쓰는 것과 같다.
옷의 실루엣, 색상, 원단의 재질, 등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글을 예술로써 받아들이는 것처럼 패션을 예술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많은 분야처럼 패션에도 유튜버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옷은 이거랑 입으면 안돼요~" "이런 옷은 이런 것이랑 받쳐 입어줘야 해요"
라는 설명을 하곤 한다.
이러한 강의들은 마치 동물 하나를 아무런 의미없이 조리되지 않은 고기 한 덩어리를 내놓은 것처럼 나에게 불편함을 일으킨다.
패션은 예술이어야 한다.
자신의 몸과 정신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면 공유하고 싶어지는데 그것들을 누구에게나 가까이서 표출 가능한 수단이 패션이다.
미니멀리즘, 야성, 실루엣의 유려함 등 자신이 가진 세계관에서 정의하는 미학을 정제해 낸 미식이 예술로써의 패션인 것이다.
그런데, 정답이 있는 것마냥 모두를 획일화, 단순화 시키는 시도는 모두를 짜파게티 요리사로 만들고 있다.
물론, 짜파게티는 대중적으로 맛있다.
하지만 짜파게티나 라면만 끓여서는 훨씬 방대한 맛의 위대한 세계를 탐험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어떤 아름다움이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의 장대한 여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술에 정답이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하기로 했다.
먼저, 예술의 정의부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예술의 정의란 "자신이 보유한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행위"이다.
하지만 세상의 주류가 되는 예술의 정의는 이보다 더 넓었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의미와 감정을 환기시키는 행위'이다.
나는 일단 이 광의적 정의를 받아들이고, (정의가 좁을수록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쉬워지지만,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이니까.) 생각을 시작했다.
예술의 정의는 크게 나누면 세 부류로 나뉘어진다.
1. 형식주의 - 예술에는 ‘좋은 구성’, ‘완성도’, ‘맥락의 적절성’ 등 기준이 있다.
2. 주관주의 - 예술은 감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없다.
3. 맥락주의 - 예술은 아름다움이라기 보다 내포한 메시지이다.
여기서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형식주의에 대하여 비판적 사고를 하기로 하였다.
형식주의는 어떤 기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가?
기준이라는 단어에는 목적성이 함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달리기 선수의 자세를 평가할 때 장거리 달리기를 할 것인지, 단거리를 할 것인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층위의 목적들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건강과 경기 기록이 그것들이다.
그러니, 기준이 있다는 말을 할 때는 먼저 무슨 목적에 따른 기준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형식주의가 논하는 기준은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혹은 정신적, 감정적 만족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는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형식주의의 말을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맞는 말이다.
문화를 공유하고 신체적 특징들을 공유하고, 정신적 구조를 공유하는 이상, 우리 대다수가 공유하는 특정 미적 형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절대적 답은 존재하지 않아도 실용적 답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목적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좋은 길이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예술 같은 복잡하고 깊고 추상적인 단어는 개개인마다 해석을 달리한다.
마치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개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예술에 정답이 있는가? 라는 말은 다시,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돌아간다.
예술을 하는 창작자는 예술을 통하여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가? 라는 물음과 동등하다.
나와 형식주의자들은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보았다.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현대사회에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저 의미나 감정 등을 전달하면 그것이 예술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내가 이렇게 작성하는 글도 아름다움을 전달할 고의성이 존재하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정리하자면, 모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름에서 예술의 정의는 다르게 결정된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패션을 통해서 "나는 패셔너블한 사람" 이라는 메시지 전달이 목적이라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더 좋은 길이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아름다움에서 살코기를 다 버리고 겉만 튀겨서 접시를 내와서, 진정한 미적 감각과 센스를 내보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성에게 감점을 당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근데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여겨야 하는가?'
'왜 우리는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 사회는 책은 쌓여도 지성은 죽고 있는 슬픈 정신병동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