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어땠지.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2개의 폴더가 있다. 내 이름의 폴더와 ‘서촌글쓰기’라는 폴더. 내 이름의 폴더는 젤리나 초콜릿을 보관하는 상자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넣는다. 내 이름은 ‘내 간식(이니 먹지 마시오)’이라는 문구인 셈이다. 지금은 영어 공부, 영화, 글감 (메모 뭉치) 등이 들어있는데, 관심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서촌글쓰기’ 폴더는 책상 위에 따로 올려놓은 서류함 같은 것이다. 해야 할 일 혹은 잊지 말아야 하는 문서가 들어 있는 곳. 이 폴더에는 올해(2021년) 4, 5월 서촌의 책방에서 진행한 ‘작가와 함께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썼던 글이 들어있다. 총 6회인데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2회부터 글을 1편씩(총 5편을) 제출한다. 나는 첫 과제를 하면서 ‘서촌글쓰기’ 폴더를 만들었다. 만드는 김에 폴더 안에 앞으로 쓸 과제를 넣을 폴더를 회차 별로 미리 만들어두었다.
1차, 2차, 3차, 4차, 5차_끝.
그리고 결승선 통과지점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5차는 ‘_끝’이라고 표시해 두었다. 완주를 너무 자신했던 걸까. 나는 마지막 회차에 출석하지 못했다. 마지막 글을 쓰지 못한 채 프로그램은 끝났다. ‘5차_끝’ 폴더는 그때부터 이름만 ‘끝’인, ‘끝’인 척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있다.
거짓말쟁이의 겉은 뭔가 있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비어있다. 이 폴더처럼.
‘이 폴더는 비어있습니다.’
폴더 안은 ‘임대문의’ 종이가 붙어 있는 텅 빈 상가처럼 휑하다. 채울지, 빈 채로 둘지, 폴더를 아예 지울지 모두 내 두 손에 달려있다. 나는 이곳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잘도 이런 마음을 먹은 것은 ‘12월’ 덕분이다. (오늘은 2021년 12월 어느 날이다) 12월에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올해가 가기 전에’인데, 12월의 이 말은 어느 때보다 힘이 강력해서 뭐라도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나는 올 초에 세운 목표 중 ‘책을 만들어보겠다’라는 것이 기억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5차_끝’ 폴더를 채워야 한다. 드디어 ‘5차_끝’이 이름값을 할 시간이다.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어땠지.
비어있는 폴더는 ‘비어있다’라는 말 말고는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보인다. 어디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럴 때 왜 혼잣말을 할까 싶은데 중얼거리다 보면 희한하게 뭐라도 기억이 나긴 한다)
그날은 신랑과 함께 서촌에 갔다. 글쓰기 프로그램에 가기 전에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광화문역에서 서촌까지 걸어가는데 하늘이 참 맑다며 들떠있었다. 우리는 서촌에서 유명하다는 마제소바를 먹고, 소화 시킬 겸 근처 시장을 구경한 후에 통의동 단팥집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팥빙수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올해 첫 팥빙수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프로그램 시간이 되어 신랑은 집으로, 나는 책방으로 갔다. 프로그램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끝나고 책방을 나서면서 ‘다음 글은 오늘의 이야기’를 쓸 거라고 다른 참여자들에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날, 신랑과 이 장소에 갔을까
‘이날’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답답하다. 아! 그날 찍은 사진이 있지. 스마트폰 사진첩을 연다. 나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대신 검지로 사진첩 속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12월, 11월, 10월……. 6월, 5월.
마제소바 2그릇, 찰져 보이는 매끈한 찹쌀떡 2알이 올라가 있는 팥빙수가 보인다.
내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왠지 뿌듯해지려는 찰나. 스마트폰은 내가 놓칠 뻔한 그 날의 단서를 보여준다.
5월 11일.
5월 11일? 생각났다. 2013년 5월 11일은 신랑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이다. 그리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 경복궁역 근처에서 삼계탕을 먹었다.
나는 우리의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고 싶었고 2013년 5월 이후 8년 만인 2021년 5월 11일에 경복궁 데이트를 신랑에게 제안했다. 어떻게 우리가 처음 만난 5월에. 내가 서촌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듣게 된 건지. 나는 글쓰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이날 여기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며, 서촌과 우리의 인연을 어서 글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12일(이 역시 정확한 날짜는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가 운전하던 차가 사고가 났고, 나는 엄마의 상주 보호자로 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마지막 회차인 18일 아침 병원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단톡방에 남겼다. 서촌의 인연 대신 장문의 메시지가 나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엄마의 수술은 잘 끝났고, 2주 후 엄마도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촌도 글쓰기도 조금씩 흐릿해져 갈 무렵 작가님에게 연락이 왔다. 참여자들이 계속 글을 쓰면 좋겠다며 본인 없이 글쓰기 모임을 이어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안 그래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한 번은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그렇게 다시 서촌에서 만났다. 나를 포함한 4명은 1달에 1번씩 만나 서로가 쓴 글을 나누기로 했다. ‘작가’와 함께하는 글쓰기는 끝났지만, ‘함께’하는 글쓰기가 시작된 것이다. 7월부터 시작한 모임은 지금 12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날은 아니지만 모든 계절을 함께 하고 있다. 서촌글친구’라는 이름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서촌글쓰기’폴더도 ‘서촌글친구’로 바꾸고 ‘차수’ 대신 ‘월’을 붙였다. 1차, 2차, 3차, 4차, 5차_끝. 그리고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끝’이 붙은 폴더는 더는 없다. 나는 우리 모임의 ‘끝’이 언제일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이 있을 것을 알지만, 언제인지 확실히 알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서촌과의 인연이 우리(신랑과 나)에서 또 다른 우리(서촌글친구)로 이어졌듯, 끝이 또 다른 어딘가로 연결될지도 모르니까.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았다. 이제 잃어버린 글을 쓰면 된다. 그런데 비어있는 ‘5회차_끝’의 폴더를 채우고 싶지 않아졌다. 5월인 척 글을 써서 이 폴더를 채운다면 이 또한 거짓말쟁이 아닐까. 어쩌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보다, 지금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12월의 폴더가 눈에 들어온다. 비어있는 또 다른 폴더다. 12월 모임이 다가오면 12월의 이야기로 채울 예정이었다. 문득, 이보다 12월에 어울리는 글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5회차_끝’보다 ‘12월’에 더 어울린다. 이 글에는 잃어버린 그 날도 있지만, 그 보다 지금의 내가 있다. 그날을 잃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나는 ‘서촌글친구’ 모임에 그리고 서촌의 이야기를 담을 책에 ‘그날’보다는 ‘지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이야기는 5월인 ‘척’ 하는 이야기가 아닌, 5월이면서 12월인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5회차_끝’ 폴더는 빈 채로 둘 생각이다. 가끔은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비어있는 것에도 나름의 이야기가 채워져 있는 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