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나의 에고였다
나는 자의식 과잉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자아는 나에게 삶의 원동력 혹은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가 되어주었지마는.
솔직히, 좀 완곡해서 표현하자면 그런 에고가 강아지 거시기같을 때도 있다.
*
인생이 참 고달프다고 느낄 때.
물티슈로 샤워를 대신했을 때나, 혹 몸에서 냄새가 날까 싸구려 방향제를 뿌리던 때나. 배고파서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음식을 훔쳐먹었던 때나. 또 뭐가 있냐. 갑작스런 비에 우산 하나 더 사는 대신 비 처맞으면서 기숙사 가던거?
가족이 가족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그런 까닭에 해체되고 있는 것? 그것을 무력하게 지켜만 보아야 하는 것? 그런 자신에게서 무기력함을 느껴야 하는 것?
뭐.
이래저래,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불쌍한 일'에 해당하는 경우는 그 모양새가 대개 정해져 있는 법이었다.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불쌍해봐야 '사고나 질병에 의한 갑작스런 죽음의 목도' 정도겠지.
그러나 아무리 불쌍해도 전근대를 살아간 사람들에 비하면 제법 윤택한 불쌍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나를 '드라마 주인공'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불쌍하고도 불쌍한 나'에 너무나도 오랜 시간 집착하고 있었다.
나의 자의식은 나의 불쌍함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여기어 나의 '다소 불우한 인생'을 어디 뭐 대단한 고전역작의 주인공마냥 둥가둥가 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에고가 스스로도 좀 한심한 경우였다.
내가 도대체 어디가 특별할까.
차라리 특수하다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의 특수함이라는 말에 한하여- 모를까 나는 왜 나를 특별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을까.
고작 수십만원으로 매 달을 버티고.
이번 시험 망하면 국가장학금 못 받는거 아니냐고 걱정하면서도 출석은 엉망인.
그런, 교수님 전공수업조차 제대로 못 따라가는 저능아 새끼가.
도대체 언제까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나를 포장하려 드는 걸까.
꿈을 품은 것이 삶의 긍지가 될 수는 있어도 그건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그런 기본 자세가 되어야 긍지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너는 왜 너를 특별한 사람인양 남에게는 눈꼴만 시린 꼴분견의 자세로 득의양양하냔 말이다.
*
나는 더 이상 내 상처를 조롱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상처를 핥기 바쁜 저열한 꼬락서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나는 불쌍한 사람인가?
백년 전 이 땅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레디-메이드 인생에 절망하여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이름을 파는 그런 선택지 앞에서 어떤 고뇌를 했을까.
수십년 전 이땅의 지식인들은 저들의 민족이 그치들의 조국을 위하여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 그 초토화된 대지 위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다시.
나는 불쌍한 인간인가?
지극히 사소한 인생의 비극을, 왜 들리지도 않는 백그라운드 뮤직에 흐느끼며, 나는 어쩜 이리도 불쌍한가 연민하려 드는가.
내가, 불쌍한 인간인가?
병신새끼야 시발 어디 한 번 제대로 대답해봐.
왜 스스로를 연민의 늪에 빠뜨려 허우적 거리고 있지? 당장 튀쳐 나올 수 있는 높이면서 물장구만 치고 자빠졌냐고.
솔직해지자.
나는 내 불쌍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그게 내가 내 삶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하는 모든 까닭의 근본적인 이유였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있다.
나의 에고는 나를 한 없이 불쌍케 여기고 있었다.
이 시대의 수난자라고 여기고 싶어하고 있었다.
*
무얼 기대하고 있는가.
'불쌍한 인간'을 연기하며 스스로를 시궁창 인생에 처박아두고 비극을 극복할꺼야 정신병 환자마냥 웅얼거리기만 하는 이유는 무언가.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짠 하고 나타난 어떤 세련된 여자가 내 인생을 구원해줄꺼라 기대라도 하고 있는가.
지랄하지마라.
지랄하지말자.
아무도 내 인생을 구해주지 못한다.
어떤 이유 -계획된 사랑이었는지, 뜻밖의 실수였는지- 에 해당하였던 간에 나는 늦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말았고, 그렇기에 나의 부모는 그렇게 멀지 않은 시일내에 정상적인 형태의 경제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 장애가 발생할 것이며, 나의 형제들은 이제 그들의 가정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그렇기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기를 희망하는 나의 진로는 하루가 다르게 온갖 애로사항이 솟구칠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좁혀진다.
등신같은 에고를 이제는 접기도 해야할 터였다.
내 유년시절의 자랑은 이 바닥에선 빛바랜 여행사진에 불과하다.
나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이렇다 할 스펙도 없는 평범한 부류에 해당한다.
나는 불쌍한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불쌍한 인간으로 여기어 그런 자신을 연민하는 것에서부터 남에게 받지 못한 위로에 대한 욕구를 대리만족하는 저급한 취향의 변태새끼에 불과하다.
나는,
나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으면 안된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을 여유가 없다.
나는 인간으로 죽고 싶다.
사회의 톱니바퀴로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으로 죽고 싶다.
그러기 위한 꿈이다.
그러기 위해 다시 꾼 꿈이다.
과학자,
세밀하게는 식물학자,
보다 정확하게는 작물연구자.
또, 소설가.
그리고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에고의 기능의 일부를 정지시켜야 할 당위가 존재했다.
한 번만 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쌍할까 궁상떨며 자기위로 해댔다간 아주 뒤지는 수가 있다.
나는 이제 그만 알을 깨고 나오고자 한다.
이것이 어째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아마도. 나의 나를 향한 지극한 연민은 나의 에고가 마련한 일종의 안전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동차에서 안전벨트를 차고 있어봐야 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나는 자살하지 않는다.
이미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총 세 번을 거부했으며 앞으로 또 어떤 불가피한 시련과 비극이 찾아오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살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나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방법이 아니므로.
그러니 안전장치는 필요없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나를 보듬어주지 않고자 한다.
위로는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에 가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테니까.
새는 어디로 날아갈까.
아브락사스에게?
나는 이제 데미안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친 싱클레어가 되었다.
울부짖는 것은 오페라 가수에게 맡기자.
*
나의 과잉된 자의식에게.
에고에게.
나는 불쌍한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인간으로 죽는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