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배움으로 이끄는 말
교실에서는 누군가의 실수가 금세 ‘재미의 대상’이 되곤 한다.
또한 서로가 가진 것을 두고 재단하고 평가하며, 우열을 가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럴 때마다 교사는 방향키를 단단히 잡아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교실에 들어올 때 휴대폰 전원을 끄거나 무음으로 해두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깜빡한 학생의 휴대폰 벨소리가 수업 중 울리게 되면,
어김없이 누군가 외친다.
“어~~~~~~ 또 희준이네~~”
이 말이 신호가 되어 너도나도 한마디씩 얹기 시작한다.
“넌 왜 그러냐~?”
“또 너야?”
“핸드폰을 또 안 껐어?”
아이들의 말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쏟아진다.
자극적인 언어가 재미로 포장되어 순식간에 퍼진다.
겉으로 보기엔 즐거워보인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된다.
사실 두세 번 실수한 학생은
대부분 다섯 번을 넘기지 않고 실수를 스스로 교정한다.
그러나 실수할 때마다 반 친구들이 까내리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한다면,
그 순간은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나도 상대의 약점을 찾아야만 하는 사건’으로 변질된다.
상처받은 마음은 방어를 만들고, 방어는 공격을 부르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가 감정의 단단한 벽으로 번지고,
관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만든다.
그때 필요한 건 교사의 한 문장이다.
“그만하면 되었어.”
그리고 차분히 덧붙인다.
“희준이는 이번에 다시 배운 거야. 이제 그만 멈춰.”
이 말은 잘못을 덮어주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의 시선을
‘실수한 친구’에서 ‘배우고 있는 친구’로
돌려주는 나침반이다.
이 말은 부정적인 말을 내뱉은 아이도 수치스럽지 않게 하고,
번번이 같은 실수를 한 아이도 주눅들지 않게 한다.
까내리는 말에 동조하며 잠시 재미를 느끼는 아이들도
언제든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 불안감은 자연스러움을 잃게 하고, 자존심의 갑옷을 두르게 만든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이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었을 때
일종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
교실 안의 북극성을 다시 가리켜주는 존재로.
교실 안의 북극성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로서 지닌 본래의 가치와
그 존재가 배움과 성장을 통해 빛나려는 가능성에 있다.
그리고 북극성을 향해 가는 길은
때때로 잘못 들어서 돌아가기도 하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방향이 있다는 사실은
교실 공동체 전체에 안정감을 준다.
“이곳은 안전한 곳이야.”
그 믿음에서 문화가 만들어진다.
믿음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교실은 비난 대신 이해가, 조롱 대신 여유가 자리 잡는 공간으로 바뀌어간다.
서로의 다름을 완충하는 쿠션도 그때 생긴다.
우리는 모두 배우고,
모두 자라고 있는 중이다.
나도, 아이들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들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다시 북극성을 가리킨다.
그 반복 속에서
교실은 조금씩 더 배움의 자리로 변해간다.
흔들릴 때마다
잠시 멈추어 북극성을 확인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일.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