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준비를 하다 보면
가끔 아이들의 손길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날도 학습 자료를 만들다 보니
가위질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급히 도움을 청했다.
“누가 도와줄래?”
여학생 세 명이 반짝 손을 들었다.
고맙고, 대견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말했다.
“이건… 시은이가 하자.”
시은이는 우리 반에서
자율적으로 선출한 리더다.
꼼꼼하고, 책임감 있고, 일머리가 있다.
나머지 두 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해가 귀엽게 볼멘소리를 했다.
“왜요, 선생님. 저도 잘하는데요.”
나는 웃으며
“그래, 알겠어” 하고 넘겼다.
상처받은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서운한 기색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다음 날 아침, 아침열기 시간.
나는 다해를 살짝 불렀다.
“다해야, 잠깐 나와볼래?”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 시은이를 선택한 건
시은이가 꼼꼼하고 꾸준한 부분이 있어서였어.
선생님이 평소에
너를 칭찬하는 포인트 알지?
음악을 틀 때 DJ는 늘 너에게 부탁하잖아.
감각적인 그림 솜씨가 필요할 때도
선생님은 늘 네가 먼저 떠올라.
다해야,
넌 이미
네가 잘하는 걸로 충분히 빛나고 있어.
너는 너 잘하는 것 하면 돼.”
순간,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선생님, 근데 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맺혔다.
그 눈을 보고 알았다.
내가 건넨 짧은 한마디가
아이의 마음에 닿았다는 것을.
친구를 인정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비교하고,
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
아마 아이들도, 어른들도
살아가며 수없이 만나게 될 감정일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타인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며
평정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교사라는 일은
매일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를 지목할지,
어떤 말로 아이의 마음을 감싸줄지,
어떤 순간에
조용히 힘을 실어줄지.
나는 다해에게
따뜻한 불씨 하나를 건네려 했지만,
정작 더 크게 위로받은 쪽은
나였다.
“너는 너 잘하는 것 하면 돼.”
그 말은 사실
나 자신에게도
꼭 해주고 싶던 말이었으니까.
가끔 교사라는 역할 속에서
나는 모든 걸 잘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도
나 잘하는 것 하면 된다는 걸.
내가 가진 빛으로도
충분히
나와 내 주변의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걸.
아이에게 건넨 한 문장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며
아이에게 배우는 사람이다.
기존 브런치북 [보통날의 철학]에 담겼던 글을
교사의 언어와 결이 맞아
조금 다듬어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