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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원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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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진 Jun 21. 2021

내 고향 마을

2백여 가구에 거주민은 1천여 명이 전부. 거주민 대부분이 베테랑 농사꾼인 전형적인 농촌마을, 두청리. 반에 반나절만 걸어도 동네 한 바퀴는 거뜬한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마저도 구역을 나눠서 불렀다. 마을 맨 뒤쪽에 서 있는 엄나무 두 그루를 기준으로 그 앞은 봉도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은 새터, 봉도리 앞은 논밭이 많은 지역은 들판이라고 불렀다. 마을 중심에 낮은 당감산을 기준으로 바깥당감산, 안당감산으로 나뉘었다. 큰 대로에 작은 구멍 가게 두 개가 마주보고 있던 곳은 주막거리였다. 주막거리의 대로는 상행선, 하행선 하나씩 2차선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1980년대(우리 이 씨 세 자매가 태어난 뒤)에 포장된 길이다. 이 길을 읍내로 가는 버스가 40분에 한 대, 시내로 가는 버스가 1시간에 한 대씩 지나다녔다. 


우리 집은 봉도리였다. 할아버지가 육이오 이후 흙벽에 기왓장을 올려 한옥 집을 지었다. 집은 ㅁ자 형태였다.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대문을 열면 출항을 기다리는 경운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경운기를 지나면 시고르자브종 개가 묶인 작은 마당이, 마당 오른편에는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를 보여줬다. 안채에는 방이 두세 개쯤 있던 것 같았는데 안방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머물렀다. 


(안채를 바라보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집 구조를 설명해 보려 한다.) 안채에서 신발을 벗고 나오면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가마솥을 얹은 아궁이가 두 개. 아둥이 뒤쪽에는 뒷산 나뭇가지를 분질러 만든 얇따란 장작들이 쌓여 있었다. 안채와 부엌 다음은 작은 사랑채다. 방 한 칸에 좁은 마루가 전부인 그곳에서 부모님과 우리 이 씨 세 자매가 지냈다. 그러고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던 수돗가, 수박과 각종 간식거리가 가득한 광(신기한 것은 한여름에도 이곳은 시원했고, 지하가 아닌데도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났다), 그다음에 별채가 있었다. 얼핏 결혼하기 전 고모와 작은아빠가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어서 연탄이 까맣게 싸인 창고를 지나면 다시 경운기가 서 있는 입구다. 


뒤뜰에는 큰 감나무가 두 그루 심어져 있었다. 가을이면 떫은 감을 따서 커다란 장독에 넣어두었다. 엄마가 장독 뚜껑을 열면 아주 맛있게 익은 감들이 터질 것 같은 붉은 볼을 가지고 바라봤다. 집을 둘러싼 담벼락에는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는데, 그 조각을 깨는 것이 내 놀이였다. 뒷간은 대문 밖에 존재했다. 담장 안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냄새와 똥파리가 들끓어 똥숫간이라는 이름이 딱 맞는, 재래식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집. 지금도 있었다면 거의 100년의 역사를 간직했을 집. 또렷하지 않은 기억이나마 붙잡고서 이 씨 세 자매의 추억을 적어보려 한다. 어쩌면 이미 기억이 왜곡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현실보다 기억이 아름답기를. 남은 날들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게.

우리 집 구조(뒷간은 대문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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