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 스물네 번째 글: 모든 건 말이 화근!
자, 지금 우리가 어떤 구설수 시비에 휘말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때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요? 가장 손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도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충분한 해명과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 그것이 오해 혹은 편견이었음이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마치 누명처럼 우리에게 덧씌워졌던 그 구설도 곧 사라지기는 할 겁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설이 없던 바로 이전 시점에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순수한 이미지에 대한 훼손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명한다고 해도 한 번 입은 내상까지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졌을 때 어떤 아이가 의심을 산 적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 아이가 평소에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인정했지만, 모든 상황 자체가 그 아이를 지목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나중에 물건을 분실한 아이가 교실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소동이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얼마 후 다시 다른 아이의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의 상황이 혹시 짐작이 되시는지요? 네, 맞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했던 그 아이가 또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저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몇몇 아이들과 면담을 해보니 모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혹시 그 아이가 가져간 게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분명 그 아이의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이전의 분실 사건에서 얻게 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만 것입니다.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구설수 시비에 휘말리면 절대 해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해 본 바로는 적극적인 해명이 있든 없든 그 구설 시비가 저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하지 않은 말과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지요. 글쎄요, 저는 그냥 이런 생각으로 버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말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들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며 살아가진 않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사람들 아닙니까? 언제 어느 세월에 타인의 생각이나 입장까지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마음이 맞는 사이가 아니라면 충분한 대화를 할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관계 속에 놓인 사람들과 우린 함께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과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든 맞닥뜨리게 되는 크고 작은 구설에 휘말리며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결국 글의 논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혹시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고 있는 건 아닌지요? 어떤 방법이 더 현명한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듯 어떤 식의 해명이 따르건 간에 우린 그 일로 인해 약간의 대미지는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저 가급적이면 타인에게 오해를 살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 조심하며 사는 것,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만, 사람이 어찌 매번 그렇게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쳇말로 때로는 조금은 쿨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