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Apr 28. 2024

구설수 시비

삼백 스물네 번째 글: 모든 건 말이 화근!

살다 보면 불필요한 말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 것처럼 오인을 받기도 하고, 때론 우리의 선의가 무슨 꿍꿍이 속이라도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으레 그럴 때면 당사자는 속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해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서 비롯된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명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명한다고 해서 구차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로에게 쌓인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보다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지 않은 언행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사람이 구차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와 같이 말이나 행동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고, 우리는 흔히 구설수에 휘말린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남에게 시비하거나 헐뜯는 말을 들을 운수라는 사전적인 정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린 이 구설수 시비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말은 곧 그 어떤 사람이라도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설수라는 것은 '나'가 아닌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이나 시선을 집중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는 일절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면 이런 구설 시비는 최소한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만 생각해 보면 가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수시로 이런저런 구설수 시비에 휘말리며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그 각각의 순간에서 우린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기로에 놓입니다. 구설수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면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구설수에 휘말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니까요.


자, 지금 우리가 어떤 구설수 시비에 휘말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때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요? 가장 손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도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충분한 해명과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 그것이 오해 혹은 편견이었음이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마치 누명처럼 우리에게 덧씌워졌던 그 구설도 곧 사라지기는 할 겁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설이 없던 바로 이전 시점에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순수한 이미지에 대한 훼손까지는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명한다고 해도 한 번 입은 내상까지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졌을 때 어떤 아이가 의심을 산 적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 아이가 평소에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인정했지만, 모든 상황 자체가 그 아이를 지목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나중에 물건을 분실한 아이가 교실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소동이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얼마 후 다시 다른 아이의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의 상황이 혹시 짐작이 되시는지요? 네, 맞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했던 그 아이가 또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저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몇몇 아이들과 면담을 해보니 모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혹시 그 아이가 가져간 게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분명 그 아이의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이전의 분실 사건에서 얻게 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만 것입니다.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구설수 시비에 휘말리면 절대 해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해 본 바로는 적극적인 해명이 있든 없든 그 구설 시비가 저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하지 않은 말과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지요. 글쎄요, 저는 그냥 이런 생각으로 버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말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들었을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며 살아가진 않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사람들 아닙니까? 언제 어느 세월에 타인의 생각이나 입장까지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마음이 맞는 사이가 아니라면 충분한 대화를 할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관계 속에 놓인 사람들과 우린 함께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과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든 맞닥뜨리게 되는 크고 작은 구설에 휘말리며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결국 글의 논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혹시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고 있는 건 아닌지요? 어떤 방법이 더 현명한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듯 어떤 식의 해명이 따르건 간에 우린 그 일로 인해 약간의 대미지는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저 가급적이면 타인에게 오해를 살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 조심하며 사는 것,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만, 사람이 어찌 매번 그렇게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쳇말로 때로는 조금은 쿨하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씨를 심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