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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l 09. 2024

선진국 망상

삼백 예순다섯 번째 글: 겉만 멀쩡하면 뭐 할까요?

며칠 동안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장마철에 많은 비가, 그것도 며칠간 온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에 속합니다. 그런데 장마가 시작되자마자 벌써 이재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한 초등학교 강당에 대피해 임시로 기거하고 있는 누군가가, 두고 온 집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며 발을 동동 굴렸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편안하고 안전한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이렇게 늘 다양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껴보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비는 어김없이 옵니다. 그 어김없는 비에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어딘가에선 수해를 입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수해를 입었던 지역은 해마다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혹시 이런 것도 후진국형 재난 사고라고 지칭해도 될까요? 아무리 천재지변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해마다 같은 곳이 물난리를 겪는다면, 수해를 당한 당시에 임시로 땜질식 처방을 한 탓에 이듬해에 또다시 같은 수해를 입는다면 이를, 더는 자연재해라서 불가항력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철학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후진국형 재난이 거듭해서 일어난다는 건 그저 운이 나빠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전형적인 후진국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후진국형 재난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안전, 훈련, 그리고 대비를 거론합니다. 늘 안전 의식을 갖고 생활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종 재난 및 사고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반복적으로 훈련도 뒤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의 말처럼 안전, 대비, 그리고 훈련과 같이 쉬운 말도 없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몇 가지만 반복해서 실천하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대형 사고나 재난이 따르는 건 그만큼 이 세 가지 단어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역량을 초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쉬운 것이 우리의 역량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아직까지 가장 기본적인 선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우리가 갖추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말이 되는 셈입니다.


우린 지금 선진국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경제적인 지표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를 축적하고 있다지만, 가계 부채 비율이 사상 최고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득대비율 가계 부채 부담률이 세계 4위라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침에 뉴스를 들으니 가계 부채 규모는 사상 최고에 달하는데 국제선 이용객 수 또한 역대 최고라고 합니다. 더는 논할 것도 없이 자살률이나 노인 빈곤율 또한 세계 최정상을 달리고 있고, 불과 10년 전에 2~30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90%가 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헬 조선'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절대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과연 겉만 멀쩡하면 뭐 할까요? 며칠 동안 씻지 않아 온몸에서는 냄새가 나는데, 금방 산 새 옷만 입는다고 그 사람의 차림새가 완전무결하게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왜 모를까요?


마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에게 어른 양복을 입힌 것 같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의 격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이 있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딱 현재의 우리의 모습에 걸맞은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으면 되니 안 되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린 이미 그 레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얼른 선진국 망상에서 벗어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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