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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13. 2024

장인어른 생신

169일 차.

오늘은 장인어른의 생신일입니다. 1944년생이시니 올해로 여든한 살이십니다. 뭐 만 나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영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뭔가 숫자로 장난을 치는 듯한 느낌도 있고, 고작 '-1'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사람은 달라지지 않으니, 전 어딜 가서든 나이를 이야기할 때 현행의 만 나이법에 의한 계산을 논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나이를 물으면 쉰셋이라고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이미 오십 년 가까이 몸에 익어 온 습관입니다. 제가 쉰둘이라고 저를 소개한다고 해서 제 출생연도인 1972년이 갑자기 1973년이 될 리는 없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분명 저희 가족에게 기쁜 날입니다. 장수라고 하려니 좀 뭣합니다만, 지병을 갖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큰 탈 없이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만 해도 가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경사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전 아직도 아내의 아버지를 장인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저처럼 장인어른이라고 지칭하는 분들이 여전히 많을 겁니다. 어쩌면 사회의 문화를 선도한다고 볼 수 있는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아내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이건 분명히 TV가 잘 못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미디어에 대한 영향력으로 따지면 가장 막강한 매체에서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는 건 방송 운영의 철학 자체가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 저속한(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수준이 높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TV를 잘 보지 않습니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예법의 범위에서 그들에 대한 올바른 호칭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의미로 보면 부모인 것은 사실이나 이 호칭에는 그만큼 쉽지 않은 관계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탓이겠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곧잘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부르면 불편하지 않느냐고, 혹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 말은 곧 제가 두 분을 그렇게 부른다는 건 그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거리감을 두겠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딸 같은 며느리 혹은 부모 같은 시어머니(시아버지)라는 표현은, 말은 성립해도 결코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같은 사위 혹은 부모 같은 장인어른(장모님) 역시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거리감을 두자는 게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님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충분히 그들을 존중하되 지켜야 할 선은 지키자는 것입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장인어른이 더더욱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년의 즐거움과 여유를 만끽하며 사셨으면 합니다. 노년도 살 만하다는 걸 저나 제 아내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셨으면 합니다. 장인어른의 지금의 모습은 곧 다가올 저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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