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제야 교감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철현의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할머님! 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본교 학부모님들의 생각이십니다."
"면목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한 군데에 정을 못 붙이던 우리 철현이가 이제 겨우 적응 좀 하나 싶었는데……."
"저희야 철현이가 여기에 있어도 괜찮습니다만 학부모님들이 저렇게 싫어하신다면 아이에게도 그다지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철현이를 지키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본교를 떠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철현이를 위하는 길인지 댁에 돌아가셔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철현이 이 학교에서 떠나기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한 교감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 선생은 교감을 뒤따라갔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나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승진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내년 초에 교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알려진 교감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교장도 인근 K시 교육장(하급교육행정기관인 시·군·구 교육지원청의 총책임자)으로 발령받아 갈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철현은 그들에게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였을 테다.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는 날엔 두 사람 다 향후의 진로에 먹구름이 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예정된 승진이 진행된다고 해도 그 불미스러운 사고의 정도의 따라 시일이 충분히 늦춰질 수 있는 문제였다.
오직 자신의 일신만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자신이 관리자로 있는 동안은 교내에서 그 어떤 사고나 사건도 일어나선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만에 하나 책임 소재가 따르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린아이가 그 책임을 떠안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무심코 TV를 보는 동안에도 하 선생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사과를 깎던 윤정이 쟁반에 칼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왜 그렇게 멍해?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긴 거야?”
“응.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안 나는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가끔 감정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누구보다도 냉철한 생각을 들려주던 윤정이었다. 어쩌면 마음 한편에서 아내인 윤정이라도 자신을 지지해 주길 바란 건지도 모르겠다.
하 선생은 철현이 전학을 오게 된 과정부터 낮에 회의실에서 있었던 소동을 윤정에게 얘기했다. 얘기가 끝나자마자 윤정은 하 선생을 노려보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난 이러는 당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풋내기 교사가 아니잖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왜 그걸 몰라? 그리고 당신도 당신이지만 당신에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잖아. 뱃속의 우리 아기는 어쩌고?”
“이 일과 우리 아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갑자기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왜, 상관이 없어? 혹시 그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명령불복종 같은 걸로 징계라도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심하는 하 선생과 달리 윤정은 대뜸 징계부터 거론했다.
“징계는 무슨……. 이게 징계 거리가 된다고 생각해?”
“그럼, 되고도 남지. 그러면 뭐, 당신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직장생활을 했다고 생각해? 설사 그렇다고 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차피 관리자들에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거라고. 어디에 어떻게 갖다 붙이느냐에 따라 흠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야. 한두 해 학교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직도 그런 것 하나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야?”
"당신 얘기는 충분히 이해했는데,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 선생은 막상 그렇게 말하면서도 윤정의 말에 오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터운 담벼락 하나가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 온 느낌이었다.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억양을 높이는 모습이 어쩐지 낮에 회의실에서 보았던 학부모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한쪽 귀로 윤정의 잔소리를 듣는 동안 반대쪽 귀에선 학부모들의 원성이 울려댔다.
“징계도 징계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신이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따돌림당할 게 분명한데 날 더러 그걸 두고 보라고?”
“따돌림당하긴 누가 당해? 내가 뭐 나쁜 일이라도 벌인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사람이 왜 이렇게 답답해? 나도 당신이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옳은 일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야.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열 사람 중에 아홉이 그르다고 하면 그건 아닌 거야.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란 말이야. 저마다 제 앞가림하기 바쁜 사람들이 어디 남의 일에 신경이나 쓸 거라고 생각해? 당장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돌아올 것 같으면 자신이 살 길부터 찾는 게 사람이라는 거 몰라? 특히 그게 교직사회의 특성이란 것도 말이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 선생은 과연 윤정이 자신의 아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어느새 윤정의 입에선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초등학생을 나무라는 담임교사 같은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한 이불을 덮고 한솥밥을 먹고 산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어떻게 하더라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다 등을 돌려도 아내인 윤정만큼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 확신했던 그 믿음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실 점거 소동이 있고 나서 한 주가 지났다.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조용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날 이후로 학교를 다시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교장과 교감도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정작 문제는 후폭풍이 아이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하 선생이 보지 않는 곳에서 철현에게 압력을 가했고, 급기야 대놓고 철현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하 선생은 아마도 학부모들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사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교육자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 선생은 철현을 따돌리는 반 아이들에게 어떤 이유로든 친구를 따돌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며 두어 차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그런 하 선생의 교육적인 소신과 지도가 문제를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하 선생은 교장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면담 당사자를 콕 집어서 보자고 한다면 피할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핑계를 대고 안 갈 수 있어도 시일을 지체하면 할수록 하 선생에게 불리할 뿐이다. 문을 닫고 자리에 앉자마자 교장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반에 있는 철현이라는 학생은 아직도 그러고 있나요?”
결국 그 이야기 때문일 거라는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 선생은 또 자신도 모르는 일이 어딘가에서 터진 건가 싶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전학을 가겠다는 눈치를 주지 않더냐는 얘기입니다.”
“그런 움직임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애들이 꺼리고 따돌리는 것 때문에 철현이가 조금 힘들어하고…….”
하 선생의 말을 듣기나 한 건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꼬리를 자르고 나왔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할 얘기가 있어서 오라고 한 겁니다. 하 선생님! 그 반 학생들이 모두 몇 명이죠?”
“스물아홉 명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