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타임머신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곤 했습니다. 다 커서는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뭐, 꿈을 꾸는 데 무슨 죄일까,라는 뻔뻔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타임머신이 있으면 참 좋겠다며 입맛을 다시기도 합니다.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달아야겠습니다. 첫째,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려 합니다. 둘째, 현실 속에 그런 타임머신이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막 타임머신에 올라탔습니다. 빛보다 빨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몇 가지 안전 장비를 단단히 착용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몸이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틈 없이 특수제작된 옷도 껴입었습니다.
이제 버튼만 누르면 눈앞에 보이는 시간이 정지하게 될 겁니다. 저는 드디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되고요. 참, 그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올 것까지 감안해야 하니 타임머신 연료저장고에 기름이 충분히 들어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환경과 사람들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머리도 특수제작된 헬맷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습니다. 작은 불순물이라도 그 흐름 속에 끼어들면 어떤 오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재채기나 기침이 나도 한동안은 참아야 합니다.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계기판에 저는 이렇게 쳐 넣어야 합니다. 2000년 10월 2일. 이제 ‘스타트’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길게 한숨을 쉽니다. 특수의상에 부착된 얼굴보호용 플라스틱 구(球) 안이 습기로 가득 찹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제가 이 큰 물체를 조정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잠시 호흡을 멈추고 기어이 버튼을 누릅니다. 수십 만 개의 색깔이 스펙트럼처럼 제 눈앞에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체가 불명확한 사물인지 기억인지 모를 어떤 것들이 머리에서 나와 가슴으로 흩어지는 중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 저는 2000년 10월 2일로 돌아갑니다.
그녀와 헤어진 지 불과 한 달 남짓, 아직 마음이 아리고 수시로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사랑했었지만, 결국 저는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일선 현장에 발령받은 지 첫 해인 저는 학교의 눈치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징검다리 휴일을 이용하여 가운데에 낀 날을 연가로 사용합니다.
꼭 가야겠느냐는 교장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길을 나선 건 혼자만의 여행을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완벽하게 정리할 생각이었습니다. 강릉, 태백을 거쳐 정동진으로 갑니다. 한창 연인들의 각광을 받는 장소로 뜨기 시작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곳입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번쩍 뜨입니다. 아직 10월 초였지만, 그곳은 겨울이 임박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죄다 쌍을 지어 돌아다니는 사람들뿐입니다. 마음 정리를 하려고 간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문득 그녀가 또 생각이 났습니다.
**씨, 저 지금 정동진에 와 있어요. 밥은 잘 먹고 지내고 있나요?
그렇게 문자메시지를 쳐 넣고는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안 돼, 어떻게 거슬러 온 시간인데, 보낼 순 없어.”
얼른 백스페이스 버튼을 눌러 메시지의 내용을 지웠습니다.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2024년 12월 11일의 그 상태 그대로 돌아갈 뻔했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서 그녀는 완벽히 지워졌습니다. 29살의 제게 앞으로 남은 50여 년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집니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바닷가를 거닐어 봅니다. 이런 곳은 누군가와 함께 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더 생각을 정리한 뒤에 슬슬 저의 인연을 찾아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타임머신에 올라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니 안 바뀌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어쨌건 간에 그건 가서 확인해 볼 일입니다. 아마도 분명 2024년 12월 11일의 일과 속엔 그녀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그녀가 있다면, 다시 한번 타임머신을 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야겠지만 말입니다.
P.S.) 그날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만 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여전히 저는 증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