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라도 유려한 글을 쓰고 싶어 합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자기가 읽었을 때 문맥이 안 맞는 글을 쓰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여기에서 '유려하다'는 말은 거침이 없이 미끈하고 아름답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거침이 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운 글, 이 얼마나 매혹적인 표현인가요?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감히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글을 써본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얼마나 오래 썼든, 얼마나 많이 썼든 거침이 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저는 글을 쓸 때 소리 내어 읽으면서 써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 그렇게 해도 좋고, 완성한 후에 큰소리로 읽어봐도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즉 입으로도 글을 쓰면 그냥 눈으로만 쓸 때와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쓸 때에는 눈과 손만 동원되지만, 입으로 쓰게 되면 눈, 손, 입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귀에 도달해 글의 매끄러움이나 어색함을 누구보다도 쉽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잠시 잠깐 동안 자기가 쓴 글이 마치 타인이 쓴 글처럼 인식이 된다고나 해야 할까요? 오감이 총동원되어 글을 쓰게 되면 바로 이, 지극히 주관적인 글의 객관화가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우린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면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뭅니다. 그건 아무래도 글쓰기보다는 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패터슨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 앞의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고 상상하고, 그가 지루해 떠나지 않도록 하라.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나' 혼자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우리 옆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고 상상하라는 걸까요?
바로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쓴다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손으로만 글을 쓸 때에는 철저히 '나' 혼자이지만, 입으로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땐 우리의 바로 옆이나 앞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으로서의 '나'와 함께 글을 쓰는 셈입니다. 바로 그 '또 다른 나'에게 쓴 글을 읽어주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또 다른 나)가 이내 고쳐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리 내어 글을 읽게 되면 글의 분위기나 상황에 알맞게 읽을 수 있고, 그건 곧 분위기나 상황에 알맞게 글을 쓰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장점을 살려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그건 마치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즉, 앞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글의 분위기를 살려서 읽어 줄 수 있게 됩니다. 보다 '객관화된 나'에게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이야기 형식을 빌어 들려주는 것이지요. 바로 그 같은 상황을 상상하라는 얘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읽어주는 글이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또 다른 우리'는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재미가 없다면 가장 먼저 그 글을 그만 쓰고 싶어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자신이 쓴 글을 읽는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글거린다고 하지요. 어색하고 뻘쭘하다 못해 민망함까지 느껴져 어지간히 단련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읽기가 망설여집니다. 어쩌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린 더더욱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어주었을 때 그걸 들은 우리 자신의 반응이 시원찮다면 그 글은 지루하다는 결론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글을 읽은 그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를 뜨거나 글을 그만 읽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