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플라톤의 『고르기아스』를 읽고…….
『고르기아스』에서 플라톤은 철학과 정치가 연설술을 가교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중략)…… 플라톤은 여기에 연루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 최초의 인물이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고르기아스』는 플라톤 철학의 가치와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가 고대 말기 신 플라톤학파의 학원에서 『알키비아데스 I』과 함께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입문서로 사용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략)…… 코린토스의 한 농부는『고르기아스』를 읽고 즉시 농장을 버리고 아테네로 와서 자신의 영혼을 플라톤의 보살핌 아래 맡겼다는 이야기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 본 책, 11~12쪽
위에 인용한 부분은 본 대화편이 플라톤의 작품들 중에서 얼마만 한 비중을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는『고르기아스』와 『알키비아데스』는 다른 대화편들에 비해 쉽게 읽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본 대화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5명 정도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고르기아스, 카이레폰, 폴로스, 칼리클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입니다.
정확한 생몰 연대는 추정이 불가능하지만 백 살 이상 장수한 것으로 알려진 고르기아스는 철학사에서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첫 세대 소피스트들의 선두 주자로 통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관록과 품위를 갖춘 노신사인 고르기아스는 자신의 기술(연설술)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종종 거만함과 자만심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추궁에 몰려 저항하고 고집을 부리는 폴로스나 칼리클레스와는 달리, 논변의 결과를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카이레폰은 소크라테스보다 두어 살 어린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충실한 제자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델포이 신탁에게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는지에 대해 물어본 이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폴로스는 연설술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었다는 것 외엔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칼리클레스는 폴로스에 비해 철학적 식견도 갖추었고 정치가답게 연설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법과 자연의 대립 문제에서 소피스트들이 주장했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소피스트들을 '하잘것없는 사람들'이라고 비하하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직업적인 소피스트로 보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어쨌거나 소크라테스는 동료인 카이레폰과 함께 고르기아스의 연설회장을 찾아갑니다. 그(고르기아스)의 연설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연설 솜씨의 정체, 즉 풍성한 '말잔치'로 대중들을 매료시키는 그 말 기술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들른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의 연설술에 대해 정의를 내립니다. 문자 그대로 '술'이 의미하는 기술이라는 측면을 이에 부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술이란 것은, 사태의 원인을 밝히고 설명을 제시하는 기능을 하지만, 연설술은 어림잡는 데 능숙한 혹은 익숙한 경험 내지는 숙달된 솜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설(술)이 사람이 하는 일들 중에 가장 크고 가장 좋은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고르기아스는,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 다른 모든 기술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보기에는 앎(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연설술이 나라의 공적인 일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습니다. 이에 비해 고르기아스는 연설술이 앎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앎을 가진 전문 기술들보다 더 설득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그 힘으로 다른 기술들을 지배하게 되는 배경에 정치 현장의 청중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전문가들이 대다수 아마추어들의 뜻에 좌우되는 상황으로,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들 앞에서 아는 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상황이라며 꼬집습니다.
그러한 연설술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인 앎을 포함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인데, 동료 시민들을 비롯해서 어떤 분야의 전문가든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힘, 혹은 막강한 정치권력을 창출하는 기술로서의 연설술을 강조하는 고르기아스로서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의문에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한편, 칼리클레스는 '천박하고 통속적'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 가며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법적인 정의를 경멸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소크라테스가 법적인 정의를 변호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법의 정의와 자연의 정의가 혼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진실은 바로 그 자연의 정의에 있다고 믿습니다.
칼라클레스의 논변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 참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는 진리의 시금석을 만났다고 반가워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정의'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의 원리로 작용하는 무절제의 도덕을 논박합니다. 다시 말해 칼리클레스의 생각이 무절제의 도덕원리에 입각해 있음을 확인하고 절제 있는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당시 일반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행복한 삶의 유력한 수단으로 믿어진 연설술을 본 대화편에서 주제로 삼은 것은, 나라와 개인의 삶에 중요하고 가치 있는 활동으로 여겨졌던 영역이 정치이고, 이 방면에서의 출세와 성공은 곧 훌륭하고 좋은 삶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 비추어, 소크라테스는 혼란스러운 아테네 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연설술의 확립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연설가 혹은 정치가의 출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치가가 해야 할 일은 시민들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돌보는 것이라고,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혼을 보살피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파합니다. 이런 목적에 부합해서 이루어지는 연설만이 진정한 '술'을 갖춘 기술로서의 연설술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어쩌면 당대에 보수나 받으면서 현실에서 살아남는 기술(?) 따위를 가르치고 있는 소피스트들을 겨냥한 것일 테고, 그런 그들이 스스로를 지혜를 가진 자, 혹은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한 통렬한 직격탄을 날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