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빼앗긴 기억을 심어주지 말자

나는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야 #1

by 이나라

맞벌이 부모가 늘어나고 있다. 부모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일과 가정에서 양립하느라 짜증만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아이도 이해를 하게 된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아이도 알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 ‘빼앗김’에 대한 기억이다.




사랑받은 기억과 빼앗긴 기억

아이에게는 오롯이 사랑받은 기억이 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어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들, 자신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그런데 이것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형제자매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자신보다 더 작고 연약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부모의 사랑을 가장 간절히 원하는 시기인 유아 시절에는 그것이 더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빼앗기고, 책을 빼앗기고, 옷을 빼앗기다 보면 아이에게는 ‘빼앗긴 기억’이 강렬하게 자리잡게 된다.


“너는 형이잖아. 이건 동생에게 양보해야지.”


사람들이 형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아이도 아직 어린아이다. ‘양보’라는 개념도 알지 못한다. 그 아이들이 순순히 양보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양보를 했을 때 부모가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아이가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의 것을 선뜻 내어주는 것이 반복되면, 그것을 당연시하는 습관이 생겨버리게 된다.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더 이상 칭찬을 받을 수 없게 된 아이들은 더 이상 양보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양보를 잘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양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욕이 적은 것이다. 특별히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아이에게 넘겨주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보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빼앗긴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 ‘빼앗긴 기억’은 점점 누적되기 시작하고, 이 무거워진 기억뭉치는 차츰 잠재의식으로 가라앉게 된다.




잠재의식 속의 빼앗긴 기억

빼앗긴 기억이 한번 잠재의식에 자리잡으면 아이는 형제에게 ‘막연한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형제를 ‘미워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아이에게 있어 형제는 가족이고, 부모가 사랑하고 있는 또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복잡한 감정으로 형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복잡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면 아이는 자신의 동생을 때리거나 꼬집는 식으로 괴롭힐 수도 있다.

이럴 때 부모는 아이를 혼내기보다 아이에게 어떤 부분이 트리거가 되어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때때로 그것은 정말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엄마가 나는 바라봐주지 않는다’일 수도 있고 ‘나도 동생만큼 밥을 잘 먹었는데 엄마가 나는 칭찬해주지 않는다’일 수도 있다.




빼앗긴 기억을 심어주지 말자

아이에게 ‘빼앗긴 기억’을 심어주지 말자. 대신 ‘얻은 기억’을 심어주자.

양보를 유도할 때는 아이가 얻게 되는 장점에 대해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생에게 작아진 옷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건 작아졌으니까 동생에게 줘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에게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이에게 “이제 헌 옷은 동생에게 줘버리고 너는 예쁜 새 옷을 입을 거야. 어때?” 하고 ‘아이가 얻게 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양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양보하기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 아이가 작아진 옷을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더라도 아이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말자.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라도 아이의 세상에서는 더없이 소중한 물건일 수 있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양보를 했을 때는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자. 한번만이 아니라, 아이가 양보를 할 때마다 늘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