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결혼하면 바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울 능력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방학 때 출산을 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 시간강사는 출산 휴가 같은 복지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때문에 선배들의 경우 학기 중간에 아이를 낳게 되면 한 달 정도 다른 이에게 대강代講을 부탁한 후 산후 조리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복귀했다.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책 찾아가며 방학 때 출산할 수 있도록 공부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계획대로 되던가? 임신을 하고 보니 신학기 3월 중순이 출산 예정일이었다. 신학기를 시작하자마자 대강을 부탁하기도 곤란했고, 아이가 딱 예정일에 나오라는 법도 없어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그 학기 강의를 반납했다.
시간강사가 강의를 반납하고 쉰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당시는 시간강사 공개 채용 시스템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 주변머리에 모교에서 배려해주는 강의가 아니면 다른 학교에 가서 강의 달라고 부탁도 하지 못할 것이 뻔해, 다음 학기부터 강의가 아예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잠깐 고민했지만,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뱃속의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출산 예정일에서 일주일을 더 넘긴 후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들어가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라 그냥 건너뛸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글로 한번 쓰고 나면 좀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막 임신을 했을 무렵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던 친구가 출산을 위해 번잡한 큰 종합병원에 다닐 필요가 없다며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보다 1년 먼저 출산한 그 친구는 선배가 하는 동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대학병원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편안하고 안전하고 좋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집에서 산파를 청해 출산하지 않았는가. 마침 동네에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가 있었다. 엄마가 자궁외임신으로 큰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의사였으며, 비상시에 대학병원 연계도 가능했다.
나의 임신 기간은 정말 편안하게 지나갔다. 입덧도 하지 않았고, 발등 한번 붓지 않았으며, 허리도 안 아팠고, 만삭이 되어서도 행동이 자유로웠다. 뱃살도 트지 않아 임신 흔적이 남지 않겠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새벽 2시경 이슬이 비쳤다. 언제 진통이 시작될지 몰라 샤워를 하고 병원에 갈 짐을 싸놓고 기다렸는데, 하루 종일 경미한 생리통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저녁때가 되어 버렸다. 엄마 아빠가 불안하니 집에 와 있으라고 하셔서 친정 가는 길에 산부인과에 들러 의사에게 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저녁을 먹으면서야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때 이모가 전화를 했다. 내 나이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안전하게 이모 집 부근에 있는 유명 산부인과로 와서 수술을 받자고 했다. 이제 막 진통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통증을 참으며 남편 00씨와 진통 간격을 체크했는데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할 진통 간격’이 되었다. 간호사에게 충분히 진행 과정을 설명한 후 본격적인 분만 절차에 돌입했다. 간호사가 손등에 링거를 꽂았는데, 아마 진통 촉진제도 같이 투여된 것 같았다. 진통이 몰아치면서 간호사는 나에게 자꾸 힘을 주라고 재촉을 했다. 나는 간호사 말에 뭔가 동의하기 어려웠다. 책에서는 힘이 주어지지 않을 때 초반부터 너무 힘을 주면 나중에 오히려 힘이 빠지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아직 뱃속에서 놀고 있었다. 전혀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간호사가 한 말은 아직도 나에게 폭력으로 남아 있다. ‘이 아줌마 아이 안 낳고 싶어요? 힘을 주란 말이에요.’
몰아치는 진통으로 거의 탈진이 되어갈 때 의사가 출근을 했다. 의사가 이리저리 체크를 하더니 분만을 촉진하기 위해 양수를 터트렸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의사가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손등에 꽂아두었던 링거도 바늘이 뽑혀져 있었고, 의사는 부근에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자고 남편과 엄마에게 건의했다. 남편 00씨는 병원 복도에서 울다가 여동생한테 들켰다고 한다.
많은 딸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서 새삼 엄마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하는데, 나는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출산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미리 이야기를 해줬어야지’라고 엄마를 원망했던 것 같다. 난 그 와중에도 엄마나 남편에게 진통을 겪느라 이성을 잃은 나의 모습을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따라 부근 대학병원에는 수술 스케줄이 다 잡혀 있어 빈 수술방이 없었다. 한참 수소문 하다가 멀지 않은 제2차 병원에 간신히 자리가 하나 있었고, 나는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남편 00씨와 엄마 아빠 여동생까지 다 태운 앰뷸런스는 천천히 움직였다. 앰뷸런스 운전사가 완전 초보여서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신호등 다 지키고, 안전속도까지 지키면서 모두의 애를 태웠다고 한다. 나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고, 의사가 아기 심장소리를 체크할 때야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아기 걱정에 심장이 죄는 것 같았던 기억만 아련하게 남아 있다. 중환자실에서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문틈으로 엄마와 여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밝아서 아이가 무사하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다.
내가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자마자 아기는 바로 나왔고, 엄마는 아들이라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남편에게 ‘00서방 아기 보러 가세’하며 통통 뛰어가셨단다. 후에 남편은 ‘장모님은 자기 딸이 아직 수술실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걱정도 안 되시는지 아들이라고 좋아하며 아기 보러 뛰어가시더라’며 뒷담화를 했고, 엄마는 ‘00서방이 아직 어려서 아이 좋은 줄을 모르더라’고 뒷담화를 하셨다. 수술 후 의사는 심각한 하혈만 없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어쨌든 아들, 우리는 목숨 걸고 만난 사이야. 만나서 반가워!
퇴원하는 날 담당 의사가 그날 퇴원하는 산모와 보호자를 다 진료실에 불러놓고 산후조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책을 펴놓고 사진 자료까지 보여주었다.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셨다. 내 남편 00씨는 그런 사진을 보면서 완전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당시 우리는 산후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시어머님은 막 고향 시골에 터를 잡고 이사 준비를 하시던 중이었고, 엄마는 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전문적으로 산후조리를 해 줄 도우미를 청할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았다. 병원비조차도 시아버님께서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내 도토리 저장고를 다 털어야 했을 것이다. 아기가 백일 때까진 할아버지를 꼭 닮아 그래도 아버님께 뭔가 보답을 해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퇴원하고 첫 밤, 수술 후 아직 완쾌되지 않은 산모와 예방 주사를 맞고 나온 터라 찡찡대는 신생아, 그리고 평생 아기 기저귀 한 번 갈아보지 않은 젊은 아빠가 밤새 공유했던 그 동지애는 아직도 마음에 서럽다. 마치 무협지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화산도에 우리 세 식구만 외롭게 동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남편 00씨가 백수였다. 오전에 엄마가 잠깐 오셔서 00씨와 같이 아기 목욕시키고, 미역국 끓여 놓고, 반찬 한두 가지 만들어 놓고, 아기 기저귀 개 놓고 가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잠깐 오셔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해주셨다. 그 나머지는 남편이 다 했다. 남편의 백수 상태가 나의 아늑한 쉼터가 되었다.
내 남편 00씨는 혹시라도 내가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나중에 힘들게 될까 봐 전전긍긍 아무 것도 못하게 했다. 무거운 것을 들게 될까 특히 우려했는데, 나는 밥 먹을 때 숟가락 젓가락 드는 정도만 해야 될 지경이었다. 내 남편 00씨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미역국밥과 시아버님께서 보내주신 보양식품 등으로 하루에 꼬박 다섯 끼를 차려 놓고 내가 다 먹는지 어떤지 지켜보았고, 나는 나대로 아이에게 젖을 먹일 욕심으로 하루에 다섯 끼를 다 비웠다. 다행히 음식이 입에 달았다.
산후조리 중에 시부모님께서 잠깐 아기를 보러 오셨다. 그런데 하필이면 어머님께서 감기 기운이 좀 있으셨다. 혹시 아기한테 감기라도 옮으면 어쩌지 하고 내심 속을 태우고 있던 차에 어머님께서 예뻐 어쩔 줄 몰라 하시며 아기를 안으려고 하셨다. 그 순간 남편 00씨가 큰소리로 ‘엄마, 아기한테 감기 옮기면 어쩌려고 그래’라며 만류했다. 어머님은 무안하고 당황하셔서 얼굴이 붉어지셨지만, 그 순간 난 남편이 결혼 후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웠다.
아기는 젖이나 분유나 주는 대로 잘 먹었고 잠도 잘 잤고, 나도 수술 후 무난하게 회복이 잘 되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아빠는 외손주가 보고 싶어 틈만 나면 핑계를 만들어 엄마를 따라 우리 집에 오셨다. 한 번은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시다가 얼굴에 아기 오줌 세례를 받기도 하셨다. 다들 어찌나 웃었는지…
내가 출산 전에 선배들로부터 얻어들은 산후조리 팁에는 ‘절대 책이나 신문 등 활자를 읽으면 안 된다. 눈이 상하니까. 절대 펜으로 뭘 써서는 안 된다. 손가락 관절이 상하니까’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고지식한 나는 이를 절대 지켜야 할 산후조리 비급의 요점이라 여겨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는 시간을 갖게 된다. 신문조차도 읽지 않았으며, TV도 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기와 눈 맞추며 이야기하고, 아기 손가락과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또 안아 재우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늘어지게 낮잠도 잤다. 물론 그런다고 산모의 몸이 그렇게 편했을 리는 없겠지만 머릿속이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세상의 모든 번민에서 놓여난 듯했다. 마치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처럼 평화롭고 아늑했다. 한 학기를 포기한 대가로 평생 가져보지 못한 휴가를 가진 것이다. 그렇게 산후 60일을 보냈고, 산후 검진을 하면서 공식적인 산후 조리를 끝냈다.
난 오래도록 그 휴가를 그리워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그 60일의 휴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마다 둘째를 낳아야지 했다. 산후조리라는 핑계 아래 다시 한 번 그 완벽했던 휴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둘째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남편의 군복무와 진로 결정 등으로 한동안은 둘째 가지는 것을 미뤘고, 둘째를 가질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했을 때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아마 몸이 형편없이 지쳐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생활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을 때, 남편 00씨가 둘째는 낳지 말자라고 먼저 결정했다. 나 역시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남편이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내니 마음 한 구석이 몹시 서운했다. 마치 남편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소중한 휴가를 빼앗아간 듯 말이다. 그래서 요즘도 심심할 때면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사소한 복수를 하곤 한다. ‘당신은 종족 번식의 욕구가 너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