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기엔 아까운 며느리

by 징졔

어릴 때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은 잔소리는 ‘공부 안 하나’와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여자는…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였다. 부모님은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남자가 (어떠해야 한다)’라는 교육은 없었다. 아들에게도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잔소리는 하셨지만, 딸한테만, 특히 맏딸인 나한테만 무수히 많은 ‘여자가…’, 혹은 ‘여자는…’이라는 부가 조건이 붙었다.


기본적으로 몹시 보수적인 집안이라서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나니, ‘여자가 눈이 눈썹 위에 붙었으니 시집가기 쉽겠나’라고 우려하는 집안 어른도 계셨다. 아무리 ‘재주가 없는 게 여자의 덕(女子無才便是德여자무재편시덕)’이라는 케케묵은 옛말도 있다지만, 참 너무 촌스럽지 않은가. 나의 고모들만 하더라도 여자가 중학교 이상 다니면 집안이 망할 것처럼 난리가 났다고 한다. 집안 남자들은 일본 유학에 서울 유학도 당연했으면서 말이다.


아빠는 우리나라 첫 사시합격자이자 첫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나 남장 여성 국회의원 김옥선 같은 인물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해주셨다.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똑똑하고 당당한 여성으로 살길 바라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자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존재’,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은 평생 남편의 귀여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아빠의 그런 갈팡질팡한 여성관이 나의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키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나는 ‘여자가…’라는 잔소리가 나오면 무조건 반발했으며, 온갖 위악을 떨며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왈가닥처럼 굴기도 했다. 아빠는 한참 사춘기를 겪는 나에게 ‘여자는 집안에서 항상 부드러운 표정과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환하다’라고 훈계하시기도 했다. 아마도 우울한 내 얼굴이 보기 싫으셨던 것이겠지만, 사춘기에 접어들어 언제나 마음 가득 눈물로 그렁그렁하던 딸에게 그게 무슨 가당키나 한 요구란 말인가.


그런데 신기하게 내가 반발하지 않고 즐겼던 ‘여자는’, 혹은 ‘여자가’가 있었으니, 바로 집안 살림, 즉 부엌일을 배우는 것이었다.


엄마가 몸이 약하셔서 막내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집에 늘 식모 언니(가사 도우미)가 있어야 했다. 식모 언니가 빨리 구해지지 않을 때는 내가 엄마 뒤를 따라다니며 집안일을 도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부엌에서 엄마 심부름을 했고, 집안 청소를 도왔고, 엄마가 집을 비우실 때면 채 두 돌이 되지 않은 막내 동생을 업어서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기도 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요즘 나이로 치면 겨우 여덟 살인 딸을 앉혀놓고 부덕婦德을 가르치셨다. 부덕이라고 해야 뭐 거창한 것은 아니고, ‘여자는 아무리 많이 배우고 잘나도 집안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이셨다. 엄마를 길러 낸 나의 외가도 엄청나게 케케묵은 고루한 집안이었다.


아빠는 집안의 맏이는 아니셨지만 자기 집을 장만하자마자 할머니를 모셔왔다. 집안의 6대 종부인 할머니께서 계시니 자연 손님이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타고 과일을 예쁘게 깎아 내놓는 일을 제법 잘하게 되었고,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를 하고 전을 부치는 등의 간단한 일을 즐기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교에서 가사 실습을 하면 엄마를 졸라서라도 집에서 꼭 다시 만들어보고 싶어 했고, 당시 내가 만든 도넛이나 궁중떡볶이는 꽤 환영받는 간식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엔 명절이나 제사 때 부엌일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아빠는 내가 부엌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공부 안 하고 뭐 하나’라고 한소리 하셨지만, 엄마 혼자 부엌에 계신데 내가 방에서 내 일만 하고 있으면, ‘공부하면 뭐 하나, 사람이 먼저 되어야지’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박사과정 첫 학기 시작하자마자 부모님께서 할머니 모시고 지방에 내려가시면서 내가 1년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했다. 부모님 간섭 없이 우리끼리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 당시의 로망이긴 했는데, 맏딸인 나에게는 동생들 밥 해 먹이고 빨래와 청소는 물론, 매일같이 동생들 도시락도 싸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었다. 둘째는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었고, 셋째는 막 대학에 들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막내가 고3이었다. 막내 도시락을 하루에 두 개씩 싸야 했는데, 다른 동생들도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는 바람에 하루에 도시락을 네 개씩 싸야 했다.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동생들 도시락 싸고, 아침 먹을 것 준비해 놓고, 아르바이트로 학원 아침 강의 세 시간 연속으로 하고, 그 후엔 학교 가서 수업 듣고, 저녁엔 또 장 봐서 동생들 저녁 만들어 먹이고 하는 고난의 대행진 같은 시간이었다. 두 번째 학기 때는 학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어서 좀 편해지긴 했지만, 주말엔 끙끙거리며 유사 몸살을 앓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거나, 하기 싫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맏딸 콤플렉스였을까? 그랬던 것 같다.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자 할머니와 엄마는 나에게 ‘한동안은 매일 아침 한복 차려입고 시부모님께 절을 하며 아침 문안 인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시댁에서의 첫날 아침 단잠에 빠져 있는 00 씨를 깨워 한복을 차려입고 시부모님 방문 앞에 가니, 어머님 아버님 모두 너무 어색해하시면서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내일부터 하지 말아라’ 하셨다. 그럼 ‘좋아라~’ 해야 할 일인데, 나는 마치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속으로 걱정하고 오히려 서운했다. 그것도 무슨 콤플렉스의 일종이었을까? 아무튼 내가 하고자 했던 며느리 역할은 친정에서 배운 것이지, 시댁의 문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혼했을 때 아마 시어머님은 공부하는 며느리라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혼하고 첫 학기, 하필 일주일에 세 번 아침 1교시부터 강의가 있었다. 난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준비하고 다 같이 식사하고 설거지까지 다 해놓고 학교에 강의하러 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워낙 케케묵은 집안에서 자란 처지라 며느리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어쩌면 시부모님도 나 때문에 오히려 불편하지 않으셨을까? 나 없을 때 어머님께서 슬쩍슬쩍 빨래며 청소며 해주시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그건 배포 좋게 모르는 척했다. ㅋ


결혼한 지 두어 달 정도 지나자 엄마가 시어머님께 안부 전화를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괜찮으실지 여쭤보라고 하셨다. 예전처럼 안사돈끼리 사돈지를 주고받는 시대는 아니었으니 전화로라도 예의를 갖추고 싶으셨던 것이다. 어머님이 안방에서 엄마와 통화를 시작하셨을 때 나는 긴장해서 거실에서 숨죽이고 몰래 훔쳐 들었다. 띄엄띄엄 ‘아이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어요. 파 한 잎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어요. 제가 오히려 배울 점이 많습니다’라는 어머님의 멘트가 들렸다.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 생각해 본다. 나는 어머님만큼 그렇게 너른 품을 가질 수 있을까? 당시는 어머님이나 나나 서로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시기였을 테고, 아무리 사돈께 인사 치례하는 자리라도 그렇게 말씀하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다.


나는 시어머님께서 그런 후한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하고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엄마 아빠께 칭찬받을만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우쭐한 심정으로 귀가하는 학생 같았다. 아무래도 맏딸 콤플렉스가 심했나 보다. 우리 엄마는 그 이후로 딸을 남의 집의 완벽한 며느리로 키워 보냈다는 자만심에 기고만장하셨다. 딸이 며느리 노릇하느라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하신 것 같다. 엄마는 겸손이 너무 힘들어 아직도 종종 우리 딸 같은 며느리 얻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라고 자화자찬이 극심하시다.


신혼 초 스트레스에 속이 답답할 땐 가끔 콰이어트 라이엇 Quiet Riot의 컴 온 필 더 노이즈 Cum on Feel the Noize나 딥 퍼플 Deep Purple의 하이웨이 스타 Highway Star 같은 노래를 우리 신혼 방이 터져나갈 정도로 볼륨을 올려놓고 듣곤 했다. 시어머님께서 그런 막내며느리를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셨을지… 대략 난감하지 않으셨을까? 이제 와 생각하니 죄송하기도 하고, 어머님도 나에게 적응하기 쉽지 않으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가하여 우리끼리 살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나는 점점 내 살림 재미에 빠져 들어갔다. 아이가 커가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루 종일 아이와 볼 부비며 뒹굴 거리 고만 싶었고,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즐거웠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하는 소박한 저녁에, 맥주 한 캔이면 세상에 부족할 것이 없었다.


엄마와 여동생의 도움을 좀 받긴 했지만 아이의 백일잔치와 돌잔치 모두 장보기부터 손님 접대에 이르기까지 혼자 힘으로 해냈다. 아이를 업고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장 보는 것도 즐거웠고, 남편 친구들의 송년회 모임 같은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했다.


그러다가 나는 내심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않겠다고, 아니 아예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박사과정 종합시험까지 다 본 상태였고, 등록금도 완납했고, 소논문도 몇 편 썼기 때문에 딱 학위 논문만 쓰면 되었는데, 그게 몹시 하기 싫어졌다. 그냥 공부 포기하고 반짝반짝 내 살림만 하면서 살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아이 등원시킨 후 다른 엄마들과 함께 느릿느릿 아파트 단지 산책하면서 수다도 떨고, 또 커피도 같이 하면서 육아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었다. 난 아직도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들 등원등교 시킨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는 광경이 너무 부럽다.


당시 내가 처한 객관적 상황도 학위 논문을 쓰기엔 턱없이 열악했다. 육아나 가사를 대신해 줄 사람도 없었고, 논문을 쓸 만한 경제적 상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도교수가 벌여놓은 난장판에서 홀로 분투해야 하는 상황으로, 같은 지도교수 아래 있던 선배들이 학위를 받기 위해 어떤 모욕과 수고를 감내했는지 충분히 목도하고 있었다.


남편 00 씨와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내가 처한 객관적인 어려움이야 남편도 너무 뻔히 잘 알고 있기에 남편은 백 프로 공감하며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내가 학위 논문을 포기하는 데는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난 당신이 꼭 논문을 쓰면 좋겠어’가 그의 결론이었다. 좀 해서 내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남편이었던지라, 난 좀 당황했다. 일단 철수하면서 생각해 볼 시간을 좀 더 갖자고 했다.


몇 날 며칠을 더 고민해도 내 결론은 비슷했다. 남편과 토론하는 자리를 다시 마련했고, 나는 비장의 무기인 눈물까지 동원하며 남편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때 내가 했던 비수 같은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 나한테 학위 논문을 쓰라고 하는 것은 절벽 위에 날 세워놓고 떠미는 거랑 같은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대체 어떻게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거야’ 남편은 그래도 요지부동 묵묵부답, 내 말에 끝까지 동의해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40여 년 가까운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이 내 의견에 끝까지 고집 피우며 반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었다.


남편의 동의를 얻지 못한 나는 하는 수없이 부딪혀보기로 했다. 나 역시 오랜 기간 공부라는 것을 해왔는데, 이렇게 마침표도 찍지 않고 포기하면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그때 남편에게 ‘사실은 공부보다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게 더 재미있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공부하는 여자의 자존심이었을까? 그렇게 말했으면 내 남편의 반응은 또 어땠을까 좀 궁금하긴 하다.


시아버님께서 논문 제출과 심사, 인쇄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보조해 주셨고, 아빠는 심사받는 몇 달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청소와 다림질을 해주는 가사 도우미를 보내주셨다. 여담이지만 나는 집안일 가운데 다림질을 제일 싫어하고 또 못한다. 어떻게 해도 잘 되지 않는 게 다림질이다. 그리고 아이는 유치원 종일반에서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매일 새벽같이 아이 도시락 반찬을 몇 가지씩 만들긴 해야 했지만…


다행히 내가 논문 제출하겠다고 생각한 학기에 지도교수가 연구년이었고, 난 핑계 김에 지도교수를 바꾸어 비교적 편안하게 논문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 00 씨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다 주기도 하고, 책을 빌려다 주기도 하는 등 외조를 다했으나, 가끔 친구나 후배들을 우르르 몰고 와서 나를 주방에서 곱절로 바쁘게 하기도 했다.


논문 쓸 당시 남편의 외조에 대해 쓰다 보니, 가물치가 생각난다. 논문을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퉁퉁 붓다시피 살이 쪘고, 걸핏하면 어지러워 누워야 했다. 하루는 남편 00 씨가 귀가 길에 남대문 시장에 들러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왔다. 어떤 선배가 여자들 몸이 안 좋을 때 가물치를 푹 고와 먹이는 게 좋다고 했단다. 가물치를 사 오기는 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00 씨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좀 와주십사 했고, 나한테는 가물치 손질하는 것을 보면 먹기 힘들 수 있으니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사실 우리 엄마도 이런 일엔 몹시 서투르셨다. 장서 간에 가물치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해 가물치가 밖으로 튀어나와 주방을 퍼덕거리고 뛰어다니는 등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에야 찜통 안에 잡아넣고 잠잠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정성껏 다린 가물치를 매번 조금씩 그릇에 옮겨 담고 ‘비리니까 코 꼭 막고 마셔. 남기지 말고 다 마셔’라고 했으며, 다 마시고 나면 편강 한쪽을 입 안에 넣어주었다. 난 온갖 응석을 부리며 넙적넙적 받아 마시고, 그렇게 조금씩 몸을 회복해 갔다.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야 공부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공부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그 모두에게, 특히 남편께 감사드린다.


아마 내가 한참 살림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였다고 기억된다. 재래시장을 뒤져서 중간 크기보다 살짝 작은 조기 한 두름을 사다가 비늘치고 깨끗하게 손질해 소금 살짝 뿌려 꾸덕꾸덕 말린 후 식구 수대로 비닐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보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던 어머님이 거실 소파에 앉아 내 하는 냥을 한참 보고 계셨던지, 한 말씀하셨다. ‘얘, 아가. 넌 정말 공부하기 너무 아깝다’


그때는 칭찬하신 것인지 농담하신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돼 그냥 애매하게 웃고 넘겼지만, ‘어머님, 그거 칭찬이셨죠?’ ㅎㅎ ‘근데 어머님, 저 지금은 살림이 엉망진창이에요.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관심도 없고, 집안은 늘 남학생 기숙사 같아요. 그런데 살림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게 더 재미있으니 어쩌죠? 저 그래도 괜찮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