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버지가 버둥거리는 나를 억지로 안고 급하게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고, 나는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떼를 쓰며 통곡을 했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는 분가하여 타 지역의 직장으로 가시면서 동생 둘만 데리고 가셨고(당시 막내 동생은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와 당시 미혼이던 작은 아버지, 막내 고모와 같이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부모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고자 한 것이다. 짐작컨대 난 기차를 탈 때까지 울었을 것이고, 작은 아버지 품에서 딸꾹질을 하면서 잠이 들었을 것이다.
계산해 보면 2년 정도 떨어져 살았을 뿐인데 유년 시절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세 살 무렵의 일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제법 많은데, 특히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오히려 아빠는 팔베개를 해주셨던 것과 나를 높이 안아 올리면서 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꿈결처럼 남아 있다. 아마 엄마가 집안 살림을 전담하시면서 할머니가 나를 도맡아 키우셨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랑 2년 2개월 차이인 동생이 바로 태어나면서 엄마는 나를 돌볼 여유가 더 없었지 싶다.
할머니에게 나는 거의 무소불위의 소황제였다. 운동 신경 둔한 내가 자주 넘어져 무릎을 깨고 들어오자 할머니는 대문 밖 골목에 있는 모든 돌부리를 호미로 파서 없애셨다. 어리숙한 내가 동네 아이들에게 뭘 빼앗기고 울면서 들어오면 그 점잖은 체면에 밖으로 나가 동네 아이들과 대거리를 하고 싸우시면서 아이들에게 호랑이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뻥과자(쌀을 동그랗고 납작한 기계에 넣고 열과 압력을 가해 ‘칙’하고 부풀려 만든 과자로, 요즘도 가끔 파는 곳이 보인다)’를 좋아했는데, 새벽부터 그 과자 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면 할머니는 나를 업고 그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잠자는 주인아저씨를 깨워 그때부터 연탄불 피우고 과자를 만들게 하셨다고 한다. 충치로 인한 치통에 칭얼거리는 나를 업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잠이 들 때까지 자장가를 흥얼거리시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유년 시절 할머니께서 무한정 퍼부어주셨던 그런 사랑은 내 평생 어디 가도 주눅 들지 않는 영원한 내 자존감의 원천이다.
내가 할머니와 살던 곳은 남부의 M시였고, 아빠 집은 중부의 D시였다. D시의 2월은 추웠고, 난생처음 길가에 두텁게 쌓여 있는 눈을 보았다. 엄마 아빠 집에 도착해 첫 저녁을 먹는데 그때부터 소변이 마려웠다. 엄마 아빠에게 낯을 가렸던 나는 소변이 마렵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평소에 아빠처럼 나를 보살펴주시던 작은 아버지도 오래간만에 만난 형과의 대화에 열중하느라 나는 뒷전이었다. 결국 나는 참다못해 조금씩 바지에 오줌을 쌌다. 할머니는 추울까 봐 내복을 겹겹이 입혀 보냈고, 다행히 내가 오줌을 쌌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이불속에서 꾸덕꾸덕해진 속옷의 불쾌감을 참으며 엄마 아빠 집에서 그렇게 서러운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할머니의 소황제에서 바로 엄마 아빠의 살림 밑천 맏딸이 되었다. 엄마가 나에게 ‘동생들 잘 데리고 놀아라’ 하셨을 땐 무슨 우주 외계어라도 듣는 듯했다. 내가 누구에겐가 봉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동생들은 정말 너무 말을 안 들었고, 동생들이 잘못하거나 다치면 내가 그 꾸중을 다 들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얼떨떨했고 어이없고 억울했다.
어느 날 밤 자다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울면서 잠에서 깼다. 엄마와 아빠가 괜찮다며 다독거리며 다시 재워주셨는데, 할머니와는 다른 그 느낌이 어찌나 생경하고 서걱거리던지, 또다시 서러웠다. 그런데 조금 달콤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난 엄마 아빠와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한 번도 큰 소리로 떼쓰며 울지 않았고, 그렇게 집안의 맏딸이 되어갔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간 첫날, 1일 임시 담임 선생님은 수업하기도 어정쩡하다는 생각이셨는지 종이 한 장을 나눠주며 장래 희망을 쓰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고아원 원장’이라고 썼다. 선생님께서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시다가 허리를 숙여 내가 쓴 답변을 보시더니 좀 황당하다는 어투로, ‘어머, 고아원 원장? 장래 희망이 고아원 원장이라구?’라고 하셨다. 그때 한두 아이가 큰 소리로 웃었고,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고아원 원장이라는 장래 희망이 그렇게 이상한 것인가? 난 모멸감을 느꼈고, 내 장래 희망을 반 아이들에게 웃음거리로 던져 준 그 선생님이 아직도 밉다. 엄마 아빠와 같이 산 지 1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내 마음은 고아 같았나 보다.
그런 고아 같은 심정을 20년이 훌쩍 넘은 후에 나는 또다시 느끼게 된다.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친정에 며칠 머물다 시댁으로 신행 가는 절차 등등을 마치고 나니, 시댁 제사와 구정이 며칠 간격으로 겹쳐 있었다. 시아버님께서 집안의 맏이라 손님이 많았다. 시숙모님들과 동서들까지 여자 예닐곱 명이 주방에서 북적거렸으며, 어린 조카들은 이른 아침부터 우리 신혼 방에 들어와 단잠에 빠져 있는 00 씨 옆에서 이불에 초콜릿을 묻히기도 했다. 정신없이 거의 한 달 가까이를 보내고 바로 손위 동서가 아이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내려가자 그때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거실엔 불이 꺼져 있었고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다들 어디 계시지 하고 살펴보는데, 살짝 열린 어머님 방문 틈으로 안의 풍경이 보였다. 어머님은 TV를 보고 계셨고, 남편 00 씨는 그 옆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어머님과 00 씨의 친밀하기 그지없는 그 분위기에 순간 난 갑자기 낯선 남의 집에 들어온 천애고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방에 가야 할지 저 방에 가야 할지 서성거렸으며, 어디에 내 마음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고 온 우리 집, 내 가족이 너무 그리웠고, 당장 택시라도 타고 쪼르르 달려가고 싶었다. 그간 참았던 서러움이 복받쳐 나는 우리 신혼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 없이 조금 울었다.
가끔 내 안에 이상한 힘이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 불쑥 찾아온다. 난 벌떡 일어나 마치 무대에 올라가는 연극배우처럼 눈물을 닦고 얼굴을 매만지고 웃음 띤 얼굴로 ‘TV 보고 계셨어요?’하며 어머님 방문을 열었다. 어머님께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어주시며 ‘앉거라. 재미있다. 같이 보자’ 하셨다. 난 그렇게 새로운 가족 안으로 한 발을 들이밀었다.
나는 나비가 자신이 벗어놓은 껍질에 연연하지 않듯 결혼 전 시절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련되어 있는 무대 위에서 내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잘 연기하면서 나름 최선을 다해 새로운 가족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결혼 25주년 기념을 조촐하게 하면서 남편에게 짓궂은 어투로 물었다. ‘당신 맨날 나한테 고맙다고 하잖아. 근데 그 많~은 고마운 것 중에 젤로 고마운 게 뭘까?’ 00 씨가 또 어떤 신박한 대답을 해서 날 어이없게 웃게 만들까 기대를 했던 것 같다. 00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당신이 우리 가족하고 계속 좋은 관계 유지해 준 것?’이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내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 내 남편 완전 한국 남자였네’였다. 00 씨가 우리 사는 생활 안에서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둘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남편의 가족을 어떻게 내 마음에 품고 살았나? 하는 생각을 오래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여자의 시가 식구나 남자의 처가 식구를 ‘법으로 만난 사이’라고 표현하셨다. 영어는 알파벳도 배운 적이 없는 할머니의 그 표현이 영어와 비슷한 것이 참 신기하다. 할머니의 표현대로 ‘법으로 만난 사이’는 서로 법을 잘 지키고 선을 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시댁 식구들과 처음부터 마음을 주고받기보다는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세월의 정이 쌓이길 기다렸다.
결혼 초기에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00 씨가 자기 집안 식구들하고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성격도 식성도 생긴 모습도 너무 달랐다. 내 남편에게 혹시 무슨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내 아이에게서 할아버지 할머니 닮은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 고민은 바로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00 씨는 자기 집안 식구하고 너무 다르기도 했지만, 자기 집안 역사나 구성원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었고, 별로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내가 시댁 식구들에게 익숙해지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잔뜩 어려운 표정으로 시숙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남편 00 씨는 돌아앉아 혼자 신문을 읽고 있는 그런 식이다.
사람 사는 일이 참 신기한 게, 내 남편 00 씨는 자기 가족에게 그렇게 까칠하고 데면데면한 데 반해, 시부모님, 시숙들, 심지어 삼촌, 사촌에 이르기까지 시댁 구성원 거의 모두가 00 씨를 좋아하고 또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시부모님 마음속에 막내아들 00 씨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소중한 별이었다. 시댁에 적응하는 데 나도 그 덕을 좀 본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이 쌓이면서 집안의 온갖 대소사에 별 관심 없는 00 씨보다 내가 더 시댁 식구인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딸이 없는 어머님 아버님은 막내아들보다 막내며느리인 나를 우선 의논 대상으로 삼으실 때가 많았고, 심지어 두 분이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되었는지 00 씨도 모르는 이야기를 수줍은 표정으로 해주기도 하셨다.
00 씨는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낯선 시댁 문화와 시댁 식구들에게 일방적으로 적응해야 했던 아내의 그 지난 세월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시댁에 지켜야 하는 예의나 도리를 친정 부모님께도 똑같이 지킨다는 것이 나의 결혼 생활 기본 원칙이었고, 그중 하나가 명절 당일 친정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부모님은 고향에 거처를 마련해 귀향하셨고, 서울에서 내려가면 차가 막히지 않아도 족히 대여섯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시골 고향 집에서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자마자 친정으로 가겠다고 나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명절 며칠 전부터 내려가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미리 다하는 것이다. 구정 때는 겨울 방학이라 며칠 전부터 시댁에 내려가는 것이 별 문제없었지만, 추석 때는 학기 중이라 휴강과 보강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고집스레 그 갸륵한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시댁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서면 입구에 커다란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그 아래엔 늘 평상이 놓여 있었다. 나는 외가가 단감으로 유명한 지역이라 감나무에 대한 애착과 향수가 짙다. 추석에 시댁에 내려갈 때면 늘 이번에는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한가롭게 커피 한 잔 하며 시골의 가을 정취를 맘껏 누려야지라는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그 고향 집에 시부모님께서 사시던 1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만큼 시골에서 며느리의 명절 준비는 고되고 바빴다.
텃밭에서 명절에 쓸 도라지를 캐고 도라지 껍질을 벗기고 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 새카맣게 때가 끼기 마련인데, 그걸 보고 한숨 쉴 여유도 없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어머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께서 읍내에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시면, ‘휴, 한 끼 해결 했네’하며 횡재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보통은 명절 전날 밤 어머님께서 큰 솥 가득 송편이나 떡을 찌는 것으로 며칠간의 명절 준비가 끝났다.
우리가 명절날 차례를 올린 후 설거지감도 내팽개친 채 서울로 출발해도 시부모님이나 동서들이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것도 내가 할 만큼 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서로 배려하며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이었다.
명절날 차례를 지내고 나면 늘 점심때가 가까웠고, 우리는 아무리 빨리 운전을 해도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때를 놓치기 십상이었다. 대부분 친정 부모님은 주무실 시간이었고, 어느 한 해는 차가 너무 막혀 새벽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친정의 어느 누구도 내가 명절 당일 친정에 오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해야 했는지 알아주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것…, 어쩌면 서로 너무 친하다고 생각해 마땅히 해야 할 이해나 배려조차 쉽게 망각하고 생략하는 관계보다는 적절하게 법을 지키며 서로 선을 넘지 않는 관계가 더 나이스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제는 세월이 농익어 젊은 시절 시댁에서 느꼈던 서운함이나 원망도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용해될 때가 많고, 어머님의 눈웃음, 아버님의 어깨를 흔들며 웃으시는 너털웃음이 문득 마음에 사무치며 울컥하기도 한다. 내 남편 00 씨는 많은 부분 자기보다도 더 자기 가족이 되어버린 나를 통해 추억 속의 그분들을 소환해 내고 또 그리워도 한다.
내가 아니면 시부모님과 시숙들의 기일도 늘 까먹는 내 남편 00 씨, 그럴 때마다 민망하면 꼭 한 말씀하신다. ‘암튼 음력은 느어~무 복잡하다니까.’ 음력유죄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