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느 한 해

by 징졔

내 인생 어느 한 해가 새해 첫날부터 몹시 피곤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두 번째 간동맥색전술을 받은 아빠 병실을 지키느라 연말을 힘들게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남편 00 씨는 그해에 지역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학위 논문도 완성할 계획이었다. 1월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지역에 있는 선배들과 테니스 약속이 있다며 몹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나갔다. 사우나에 저녁 식사까지 하고 온 남편은 다음 날부터 미열에 몸살기로 나른해했다. 오전엔 좀 괜찮다가 오후만 되면 미열이 생기고 몸살기가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감기 몸살이라 생각하고 그저 푹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증상이 좋아지지 않아 동네 내과에 갔더니 만성 폐렴에 늑막염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내과 약을 받아 들고 폐결핵 검사까지 해놓고 서울에 약속이 있어 가던 도중에 D시에 있는 친구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보았다. 내과 의사인 친구 남편은 진찰 결과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했지만, 방사선과에서는 엑스레이를 보며 아무래도 큰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서울까지 가는 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나는 큰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남편은 일주일만 처음 갔던 그 동네 내과의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다. 아무리 심각한 병이라도 일주일 늦는다고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라면서. 다행히 동내 내과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다. 그 겨울방학 내내 나는 강의 자료와 연구 자료를 집에 펼쳐놓고 틀어박혀 남편의 병수발을 들었다. 병수발이라고 해봤자 푹 쉬게 해 주고, 따뜻하게 해 주고, 하루 세끼 영양가 있는 음식 먹게 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해엔 구정 명절에 시댁에도 친정에도 가지 못했다.


한 달 넘게 병원 치료를 받은 남편은 완치되었다. 엑스레이까지 확인한 우리는 시 외곽의 장어 맛집에서 영양 보충을 한 후 김광석의 ‘일어나’를 무한 반복해 들으며 드라이브를 했다. 2월 중순 포근한 봄이 내려앉은 남부 도시의 먼 들판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는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바쁘게 신학기 준비를 시작했고, 3월 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이의 수업 첫날, 인근 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를 하던 남편 00 씨가 강의를 끝내고 시간 맞춰 바삐 아이를 데리러 갔지만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첫날이라 예정보다 수업이 일찍 끝난 것이다. 데리러 온 보호자가 없었던 아이는 혼자 교무실에서 선생님과 놀고 있었다.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아이가 마치 특권이라도 누리는 양 즐거워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신학기에 적응해가고 있을 즈음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병문안을 다녀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빠는 두 번째 간동맥색전술 이후 회복이 더뎌 형님의 장례식장을 오래 지키지 못하셨다. 유난히 피곤해하시던 아빠 모습에 오래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한 달여 후인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투표를 하고 와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 시골집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옮겼으니 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혼비백산하여 급하게 학교 일을 이리저리 안배해 놓고 큰 시숙이 계시던 D시로 향한 우리는 K대학 부속 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먹고 자며 꼬박 일주일을 대기했다. 아이는 큰 시숙 댁에서 사촌들과 고삐 풀린 망아지 모양 맘껏 놀았지만… 그때 처음으로 형님(윗동서)들과 어머님 모시고 대중목욕탕도 갔고, 난 병원 근처 미장원에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의사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라고 하던 그 순간 정말 기적적으로 아버님께서 깨어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5년 후 돌아가실 때까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셨다. 우리는 아버님이 퇴원하신 후에도 한 달 정도 주말이면 짐을 챙겨 아이와 함께 시댁 고향 집으로 달려갔다. 직장 일에, 공부에,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역할에 우리는 숨 쉴 겨를조차 없었고, 그렇게 한 달여 후 결국 피곤이 쌓인 남편 00 씨가 기관지염에 걸려 또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럭저럭 여름이 왔고, 1학기 종강을 한 나는 6월 말 세 번째 간동맥색전술을 받아야 하는 아빠 곁에 있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아빠는 간에 양성 종양이 생겨 간동맥색전술 받고 있었는데, 의사는 세 번째 수술로 깔끔하게 다 제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분야에선 권위자로 인정받는 의사였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술 날 아침 아빠는 금식을 하고 엄마와 나는 이제나 저제나 수술받으러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로 보호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전날 찍은 폐 엑스레이에 달걀만 한 크기의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그때부터 모든 검사를 다시 시작했고, 결과는 임파선암이었다. 이미 모든 장기에 다 전이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빠는 의사를 원망하지 않으셨다. 아마 운명이려니 하셨던 것 같다.


병원에서는 계속 치료를 하자고 했지만 아빠가 거부하셨다. 아빠는 집에서 진통 패치에 의존하면서 서서히 삶을 정리하셨다. 여름방학 내내 나는 주말이면 서울로 향했고, 남편 00 씨는 집에서 논문을 쓰면서 아이를 돌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서재에서 나오더니 갑자기 눈앞에 구멍 같은 게 뻥 뚫린 듯 멍해지고 글이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손톱 색깔도 거무죽죽해져 있었다. 내 짐작으로 연초부터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데다 공부하느라 기력이 쇠해진 것 같았다. 장어라도 달여 먹어야 할까 싶어 주변에 물어물어 전통 시장을 찾았다. 그때 만난 것이 그 지역에서 ‘음지’라고 불리는, 뱀과 장어를 합해놓은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징그러운 물고기였다.


가게 주인은 너무 운 좋게 오늘 아침에 자연산 음지가 한 바께쓰 들어왔으니 이것을 달여 먹이라고 선심 쓰듯 권했다. 평소 보양식품이라면 인상을 찌푸리며 십 리 밖으로 도망치던 남편 00 씨도 워낙 급했던지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듯 순순히 가게 주인 말에 따랐다. 영지버섯 같은 몸에 좋다는 온갖 약재를 넣어 달인 음지 탕을 먹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남편은 기력을 되찾았다. 그 신기한 생선은 그 이후 어디에서도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8월 말 개강할 무렵 형제들과 시간 맞춰 온 가족이 아빠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별 여행인 셈이었지만, 난 이별을 연습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난 아빠에게 어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막내 동생네가 집안 살림을 맡고, 여동생이 아이까지 데리고 월요일에 출근하듯 와서 목요일 오전까지 엄마 아빠 곁을 지키면, 지방에 사는 나와 큰 남동생이 주말 동안 엄마 아빠 곁을 지키기로 우리 형제는 그렇게 암묵적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여동생은 엄마 아빠 곁을 지키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예정보다 몇 달 빨리 그만두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시이모님께서 돌아가셨다. 역시 우리가 병문안 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문상을 하고 추석 전날 돌아오신 어머님은 얼마나 우셨던지 눈이 퉁퉁 부어있고 목이 쉬어 있으셨다. 시이모님이 어머님께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게 위로해드려야 할지 몰라서 눈치만 살폈던 것 같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내 지도학생들의 졸업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해외로 가는 졸업 여행이라 꽤 긴 일정이었다. 하루하루 병세가 안 좋아지는 아빠를 두고 아무리 학생 지도라지만 여행을 간다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정말 내키지 않았다. 마침 학과장과 학과의 다른 교수들도 동행한다 하길래 학과장에게 지도교수 역할을 대신해주면 안 되겠는가 하고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 학과장 대답은 ‘△△교수님(나)께서 여름 방학 내내 아버님 병간호하시느라 서울에 자주 다니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셨으면 하실 만큼 하신 겁니다’였다. 그 후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난 아직 부모님에게 ‘할 만큼 다 했다’라고 하는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아빠는 이미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많아져 있었다.


남편의 학위 논문 첫 심사 날 우리 가족은 겸사겸사 다 함께 서울에 가서 아이에게 외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할 예정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여행 가방을 싸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가 막 돌아가셨다는 전갈이었다. 아빠는 정신이 맑았을 때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모든 준비를 다 해놓으셨다. 선산도 손질해 놓으셨고 고향에서 장례를 맡아서 해줄 분도 다 안배해 놓으셨다. 자신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같은 전통 장례식을 원하신 아빠는 우리 형제를 앉혀놓고 장례식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우리는 집에서 굴건제복을 하고 곡을 하며 문상객을 받았다. 남 보는 데서 음식 먹는 것도 수치스러운 것이 부모 여읜 상주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먹으면서도 울고 울면서도 먹었다. 엄마는 49제가 끝나자 세 달간 아빠 빈소를 차려놓고 매일 장을 봐와서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음식을 상청에 올리며 절을 하고 곡을 하셨다.


몇 달간 때론 매주, 때론 격주로 목요일 강의 끝내고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가서 캄캄한 월요일 새벽 첫 비행기로 내려와 출근하던 나의 생활이 끝났다. 아빠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때론 통곡을 하면서도 가슴 한쪽 무겁게 자리 잡고 있던 통증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빠는 이제 고통 없이 편안하시겠지 하는 생각에…


그런 와중에 겨울방학이 되었고, 남편 00 씨는 지도교수의 횡포에도 꿋꿋하게 학위 논문 심사에 통과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연말에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서는 부친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막내며느리를 모든 의무에서 면제해 주셨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맞은 나는 온몸이 너덜거리는 것 같이 힘이 들었다. 밤마다 심장이 예민해져 잠을 이루기가 힘이 들었고, 꼬박 밤을 새우는 날이 생겨갔다. 환경을 좀 바꾸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남편 00 씨의 강력한 주장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는 엄마께는 죄송했지만 학교에서 보내주는 해외 연수를 가족과 함께 3주간 다녀왔다. 돌아올 때는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해가 바뀌고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가 엄마를 여읜 것이다. 나는 아직 남편의 빈소를 지키고 있던 엄마를 모시고 외할머니 문상을 다녀왔다. 외할머니는 늘 자신이 자랑스럽게도 어렵게도 여기던 둘째 사위인 아빠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것을 모르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셨다.


1년간 그렇게 온몸으로 고난에 찬 회오리바람맞듯 견딘 그 비현실적인 시간 끝에 남편 00 씨가 박사학위를 받았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하신 아버님을 위해 우리는 학위복을 들고 시골 고향집을 찾았다. 학위복을 입은 남편 00 씨를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사람 일이란 참 예측할 수 없는 게, 그로부터 3년 후 내 남편 00 씨는 그 힘든 해에 받은 박사학위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학교라는 환경을 떠나버린다. 교수 채용 과정에서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불법적이기까지 한 일을 두세 번 목도하고 나자 환멸과 구토를 느낄 지경이 된 것 같았다. 남편 00 씨가 자신의 결심을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해요. 그게 좋겠어’라고 대답했다.


학생들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인지라 가슴이 좀 아프긴 했지만 내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던 이유는, 내 남편 00 씨는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자신이 만든 세상, 자기만의 천지창조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남편 00 씨가 이미 만들어진 조직에 들어가 자기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어렵게 받은 학위라도 버려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우리 부부의 인생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