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줌마 이러다 죽어요

by 징졔

내가 운전을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 겨울이 너무 허전해서였을 것이다. 남편 00 씨가 생후 9개월 된 아이와 나를 떼어놓고 방위병에 소집되어 한 달간 훈련소에 들어간 것이다. 마침 방학이었고, 난 엄마께 잠깐씩 아이를 맡겨놓고 집에서 가까운 운전학원에서 기초 운전을 배웠다. 한 달 정도 기초 운전을 배운 후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봤는데, 놀랍게도 두 번 만에 실기시험에 합격했다. 운동 신경과 반사 신경이 둔하기로 유명한 내가 실기시험에서 그렇게 쉽게 붙을 줄은 몰랐다. 그때 내 지인들 가운데는 실기시험에서 무려 대여섯 번이나 떨어진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운전 면허증을 받고 나니 아빠와 남편 00 씨가 시간 날 때마다 도로 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고 자원했다. 그런데 정말 고역도 그런 고역이 따로 없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겁에 질려 이러라고 했다가 저러라고 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 아빠와 남편 모두 비슷했다. 도로에 나가면 안 그래도 덜덜 떨리는데 특히 아빠가 옆자리에 앉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머릿속이 그냥 하얘지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너무 열이 받아서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문을 쾅 닫고 내린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버렸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채 어안이 벙벙했던 아빠는 차를 우리 집까지 갖다 주시긴 했지만 더 이상 도로 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거의 모든 차가 수동 운전이었는데, 나는 커브를 돌 때 속도를 줄이고 클러치를 밟으면서 기어를 바꾸며 핸들을 돌리는 동작을 거의 동시에 해야 하는 그 기술이 너무 어려웠다. 어느 일요일 남편 00 씨가 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아파트 앞 대로에서 유턴할 때부터 00 씨는 긴장에 긴장, 여러 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눈치였다. 어찌어찌 운전 연습을 끝내고 가슴속에 한가득 울화를 싣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남편 00 씨가 주차하는 연습을 한번 해보자고 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동은 아파트 단지에서 약간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경비실 앞 주차장 한쪽 면이 2미터 정도 높이 축대에 철제 난간이 박혀 있었다. 마침 차 두 대가 주차 공간 한 칸을 비워놓고 세워져 있었고, 남편은 그 사이 공간에 주차를 해보라고 했다. 속도를 줄이고 클러치를 밟으면서 기어를 바꾸고 커브를 틀면서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남편 00 씨가 옆에서 뭐라 뭐라 코치를 하자 더 혼란스러워진 나는 나도 모르게 엑셀을 세게 밟았나 보다. 차가 쾅 주차장 철제 난간을 들이받았고, 그 순간 다행히 엑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철제 난간의 이음새가 떨어져 흔들거렸다.


남편 00 씨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상의한 후 막내 동생과 함께 온 동네를 돌아다닌 후 겨우 철공소를 찾아 한참 만에 용접공과 함께 용접기를 실은 리어카를 밀고 아파트 주차장에 나타났다. 그렇게 우리 동 주차장 철제 난간은 오래오래 페인트가 벗겨진 채 비뚜름하게 용접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 후 나는 운전을 포기했다. 만약 그때 내가 엑셀을 좀 더 세게 밟았더라면, 그래서 차가 2미터 높이 정도의 난간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심장이 쿵쾅 거렸다.


3년 정도 지난 후 나는 지방의 한 대학에 채용이 된다. 그런데 그 지방으로 이사를 와야 한다는 것이 그 대학의 채용 조건이었다. 원서를 남편 00 씨가 대신 접수시키는 바람에 시험과 면접 볼 때 딱 한 번 내려가 보았을 뿐,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생소한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 주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들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그것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여자가 이력서 한 장 들고 시험 봐서 대학에 채용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거의 기적이야. 독도라도 가야지’라는 것이었다.


남편 00 씨와 하룻밤 새워 의논한 끝에 남편 00 씨가 서울 처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지내며 수업과 강의를 하기로 하고, 이사를 하자고 결정을 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벽 컵라면을 먹었다.


학교에서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출퇴근이 편한 가까운 곳으로 집을 정했는데, 막상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이삿짐을 이삿짐센터 컨테이너에 일주일 이상 맡겨놓고 개강 첫날에야 이삿짐을 풀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개강 일주일 전 신임 교수들 소집이 있어서 내려가 보니, 세상에나 내가 강의할 곳은 집 가까운 그 캠퍼스가 아니었다. 대학이 도시 외곽에 새로 캠퍼스를 지어 단과 대학 별로 이전하고 있었는데, 하필 우리 과가 있는 단과 대학이 그 학기부터 새 캠퍼스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마땅한 대중교통이 없었다. 자가운전을 하지 않으면 학생들 스쿨버스에 끼어 다녀야 할 판이었고, 그나마 시간 맞추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궁리를 해도 방법이 없어서 나는 다시 도로 운전 연습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 아빠의 코치 아래 기가 죽은 모습으로 2~3일 정도 도로 연습을 하고, 개강하는 날 꼭두새벽에 이삿짐을 뒤따라 내려갔다.


남편 00 씨는 나를 학교에 내려준 뒤 아이와 함께 이삿짐을 받으러 가버렸고, 같은 과 교수님이 마침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수업 후에 나를 집까지 태워주셨다. 그러면서 내가 운전하며 다녀야 할 그 도로가 교통사고 빈번한 산업도로이니 운전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겁을 주었다. 그날이 목요일이었고, 수업이 없는 금요일과 주말을 이용해 남편 00 씨의 코치를 받으며 집에서 학교까지 몇 번 운전 연습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바짝 긴장하여 덜덜 떨면서 차를 몰고 도로에 나갔다.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서툰 여성 운전자를 보면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는 등의 욕설을 하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이었다. 학교까지 30분이 넘는 주행 시간 동안 나는 뒤도 옆도 살필 여유 없이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로 앞만 응시하고 달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덤프트럭이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려대거나 상향등을 번쩍거리며 위협을 하기도 했고, 바싹 가까이 다가와서 뭐라 뭐라 험한 소리를 질러대는 운전자도 있었다. 매번 혼비백산하여 식은땀이 삐죽삐죽 솟았고, 이렇게 목숨을 걸어놓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죽을 맛이었고, 집에 오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두 번째 주 월요일, 그날은 새벽부터 이상하게 멍하니 정신이 없었다. 새 직장에, 이사에, 아이 유치원 적응 등 일이 너무 많아 주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차가 속도가 나지 않아 잔뜩 힘주어 액셀을 밟았다. 산업도로로 진입하니 도로의 모든 차들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옆에 바짝 다가와서 손짓을 하기도 하고, 또 옆으로 쌩 지나가면서 운전하는 나를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너무 느린 속도로 운전하면서 다른 이들의 주행을 방해하나 싶어 나는 더욱 액셀을 밟아댔다.


그런데 어느 한 차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뒤를 따라오면서 경적을 울리더니 급기야 내 옆에 바싹 붙어 창문을 내리고 길 가에 차를 세우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겁이 더럭 났지만 상대가 커다란 덤프트럭이 아니라 소박한 세간살이를 실은 용달차라서 용기를 내어 속도를 줄이고 도로 옆으로 차를 세우려던 순간에야 나는 내 차에서 매캐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를 세우면서야 맙소사, 내가 집에서부터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지 않고 운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둘째 시숙께서 서울에 왔다가 내려가면서 우리 주차장에 남겨 놓고 간 그 낡은 소형차를 우리는 ‘우리 똥차’라고 사랑스럽게 불렀다. 안 그래도 낡은 ‘우리 똥차’인데 정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몇 년을 쓰다 보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채로 운전을 해도 차가 앞으로 나갔던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용달차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망설이는 눈빛으로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앞장선 용달차 아저씨는 옆길로 차를 몰아 논 길 한가운데 있는 주유소로 들어갔다. 아마 평소 잘 알고 있는 주유소 같았다. 내 차를 이리저리 살펴본 용달차 아저씨는 긴 고무호스를 가져와 물로 엔진을 식혀주셨다. 그리고는 빨리 정비소에 가보라고 하시면서 시간에 쫓기는 듯 바로 용달차를 몰고 사라졌다. 난 그때 거의 정신 줄을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용달차 아저씨 아무래도 조상님이 보내신 천사였나 보다.


학교 강의 시간에 쫓겨 일단 급하게 학교로 간 나는 우리 과 조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근처에 정비소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람 좋게 생긴 조교는 서글서글 웃으며 차 열쇠를 주면 수업하는 동안 자기가 직접 정비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난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차 열쇠를 건네주었고, 수업을 마치고 나온 나에게 조교는 정비소에서 차는 별 문제없다 했다고 했다.


그 후 며칠간 나는 매캐한 냄새가 영 가시지 않는 ‘우리 똥차’를 몰고 벌벌 떨면서 출퇴근을 반복했다. 강의가 없는 금요일,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남편 00 씨와 느긋하게 아침을 즐기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우리 차가 어떨 땐 브레이크가 잘 안 먹는 거 같아. 특히 내리막에서…’라고 말을 꺼냈다. 그 며칠간 나는 사이드 브레이크도 내리지 않고 운전하다가 차에 불을 낼 뻔한 웃지 못할 희대의 캐릭터로 온 집안에 명성이 자자해져 있었다.


남편 00 씨는 이리저리 브레이크를 밟아보더니 ‘좀 그런 것도 같네’라며 별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다가, 그래도 직접 정비소에 한번 가보자고 의견 일치를 보고 주변에 수소문해서 정비소를 찾았다. 순박하기 그지없게 생긴 정비소 아저씨가 차를 해체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저씨는 브레이크 라이닝이 다 닳았다며 거의 화를 내는 듯한 표정으로 어떻게 차를 이 지경이 되도록 손도 안 보고 몰고 다녔냐고 추궁을 했다. 남편 00 씨가 엉겁결에 ‘제 아내가 초보라 운전을 잘 못해서요’라고 답했다. 그제야 내가 운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아저씨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남편을 보고 하시는 말씀, ‘아저씨, 이 아줌마 운전 좀 못하게 해요, 그러다 이 아줌마 죽어요.’


그러나 나는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 운전을 했고, 너무 다행스럽게 20여 년 간 가벼운 접촉사고 두세 번, 속도위반과 신호위반 등 교통법규 위반 서너 번으로 선방하며 내 운전 인생을 끝냈다. 혹시라도 그 정비소 아저씨를 만나면 ‘저 아직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 화 푸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제는 대중교통 선호하는 늙수그레한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지만, 터져나갈 듯 음악을 켜놓고 익숙한 길을 운전하며 출퇴근하던, 그 작은 공간의 자유로움이 가끔 그립긴 하다. 완벽한 자율주행차가 나와서 내가 다시 운전석에 앉게 되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