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추억하며

by 징졔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은 후부터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 간혹 그냥 기운을 잃고 스르르 쓰러지기도 하셨는데, 그럴 때면 나는 부리나케 아빠 회사로 전화를 걸었고 아빠는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달려오셨다.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낯선 도시에서 아빠 내조에 아이 넷을 혼자 기르며 살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까지 모셔야 했으니 말이다.


막내 동생 낳고 산후 조리할 때부터 집에 식모를 두기 시작했다. 집안 살림에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당시 엄마한테는 막내를 업어주기라도 할 도우미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고모 중에 한 분이 농촌이기도 하고 어촌이기도 한 시골에 사셨는데, 근동에서 알음알음 소개받아 믿을만한 집의 딸들을 보내주셨다.


대략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후반까지였는데, 당시 빈곤했던 농어촌 지역에서 집안의 맏딸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고모의 소개로 우리 집에 온 그녀들은 대부분 동생이 많은 가난한 집의 맏딸로, 집에 입 하나 줄이면서 돈도 모으고, 또 도시 살림도 배웠으면 하는 그녀들 부모의 의도로 보내졌다.


나는 그녀들을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불렀다. 우리는 대부분 방도 같이 쓰고, 목욕탕도 같이 다녔으며, 같이 부엌에서 노닥거리기도 했다. 엄마 아빠도 그녀들을 가족같이 대해 어린 시절 집에서 찍은 스냅사진에 그녀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고, 심지어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찍은 막내 동생 돌 기념사진에도 등장한다.


그녀들이 집에서 하는 일은 엄마 심부름이나 청소, 설거지, 엄마가 집을 비울 때 동생들 돌보는 정도였다. 그녀들은 얼굴에 뽀얗게 살이 오르고 도시 살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대부분 집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고자 했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면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엄마 아빠는 그런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워하셨다.


그녀들이 우리 집에 올 때의 평균 나이는 대략 십 대 후반으로 우리 집에 와서 초경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언니가 없는 나는 그녀들을 통해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같이 배워나갔다. 어떨 때 그녀들은 할머니와 엄마께 나를 고자질해 곤란하게도 했으나, 서로 커다란 갈등은 없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녀들을 대할 때 몹시 조심스러워졌다. 교복 입은 내 모습이 그녀들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깜박 잊고 도시락을 안 가지고 갔는데, 엄마가 점심시간에 어느 언니에겐가 도시락을 갖다 주게 하셨다. 나는 몹시 안절부절못했고, 귀가해서는 그녀와 눈을 맞추기 힘들었다. 그녀도 마치 내게 화가 난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아직도 그 일이 떠오르면 몹시 미안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같이 있었던 어떤 언니는 내게 고고와 디스코 춤사위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난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아 바로 포기했지만, 그녀가 참 멋있어 보였다. 긴 목에 스카프가 참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

이제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때 그녀들 얼굴도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두 언니가 있어 지면에 기억해두고자 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일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른들은 쉬쉬하셨지만, 나는 바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막내 동생을 보고 있던 그때의 언니가 동생을 집에 혼자 두고 짐을 챙겨 도망치듯 자기 집으로 내려간 것이다. 알고 보니 몰래 준비한 짐을 며칠간 치밀하게 동네 구멍가게에 하나씩 맡겨 놓았다가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고 했다. 후에 구멍가게 아저씨로부터 들은 말에 의하면 그녀가 챙긴 짐에는 도시에서는 흔하지만 시골에는 없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시골 고모에게 상황을 알리고 더 이상 크게 문제 삼고자 하진 않으셨다. 그리고 그녀가 무사히 자기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심하셨다. 당시 기차로 대여섯 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였으니 말이다.


내가 그녀의 이름이나 얼굴, 심지어 이마에 났던 여드름까지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녀와 같이 찍은 스냅사진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그녀가 몰래 자기 집으로 내려가면서 챙긴 짐에 딸기잼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즘이야 딸기잼이 무슨 대단한 음식도 아니지만, 아마 그녀는 집에서 만드는 그 딸기 잼을 시골의 자기 식구들에게 꼭 맛 보이고 싶었나 보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밖에서 뜻밖에 맛있는 것을 먹게 되거나 신기한 것을 보게 되면 꼭 동생들에게도 갖다 주고 싶은 맏이의 마음을.


난 이상하게 그 사실이 슬펐다. 아마 엄마 어깨너머로 딸기 잼 만드는 방법을 눈여겨봐 두었다가 만들었겠지. 집이 비었을 때 몰래 딸기잼을 만들려면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기 가족에게 딸기잼을 맛 보이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어린 내 마음을 한동안 가득 채웠다. 엄마는 그 짧은 시간에 딸기잼이 제대로 만들어지긴 했을까 라며 가볍게 쯧쯧 하셨다. 나는 요즘도 딸기잼을 먹게 되면 종종 그녀가 생각난다. 그 어린 마음이, 눈물 나도록 어리석은 그 마음이…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전문적인 시간제 가사 도우미가 등장하고 있었으며, 시골에서 도시의 가정집으로 식모살이하러 오는 어린 그녀들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집에 입주해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집도 서울이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20대 중후반 나이의 새댁이었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이랑 떨어져 우리 집에 입주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녀랑 죽이 맞아 밤에 둘이서 몰래 맥주나 과일주를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키는 작았지만 예뻤고, 집안일도 척척 잘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할머니께서 싫어하셨다. 집안일에 간섭하는 일이 거의 없으셨던 할머니로서는 이례적인 의사표현이셨다. 할머니께서 싫어하시니 엄마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왜 할머니가 자기를 못마땅해하는지 모르겠다며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남 듣기 서운한 말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할머니셨는데, 나도 할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는 할머니께서 젊은 여자가 집에 있으면 아빠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신 것이라고 짐작하셨다.


1학년 2학기가 시작된 어느 가을날 수업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나는 귀가 길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앞뒤 맥락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 마중을 나왔고, 나를 보자 반가워하며 손을 잡았던 것이 기억난다. 달동네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있던 그녀의 집은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반 지하였다.


그녀는 조그만 개다리소반에 직접 담근 과일주와 풋고추 넣고 볶은 멸치와 김치 등을 안주로 내왔다. 둘이서 과일주를 꽤 많이 마셨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는 자주 한숨을 쉬었고, 손등으로 눈물도 훔쳤다. 그녀에게 그녀 남편에 관한 일을 물을까 말까 몇 번 고민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나는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서둘러 귀가했고, 집안 식구 누구에게도 그녀의 집에 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살던 집이 요즘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다. 지금은 온통 재개발이 되어 옛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그녀 생각이 난다. 얼굴도 또렷하게… 46년 전 그녀와 내가 나누었던 그 감정은 우정이었을까?


이제 모두 인생의 노년에 접어들었을 그 언니들, 한평생 너무 눈물겹진 않으셨는지,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노년에 안착하셨는지, 두루두루 인사를 전하고 싶다. 부디 초년의 고생이 노년의 행복으로 치환되었기를 바라며,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