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횡포

by 징졔

늘 기억력에 자신이 있었다. 자타 공인이었다. 그런데 나이 60줄에 들어서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던 어떤 고유명사가 갑자기 막힌 듯 생각이 나지 않는다든지, 까맣게 잊고 있던 옛일이 전후좌우 아무런 맥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 결박이라도 당한 듯 옛일에 사로잡히게 된다든지 하는 일들이 자꾸 생기고 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다 함께 ‘패밀리 맨(The Family Man)’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남편 00 씨와 나는 세 번째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이없었던 것은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도 우리 둘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았고, 영화의 디테일은 거의 반도 맞추지 못했다. 영화가 주는 감동도 색깔이나 깊이가 달라져 있었다. 같이 영화를 보던 아들 녀석이 엄마 아빠 저 영화 정말 세 번째 보는 것이 맞냐라고 놀릴 정도였다. 세 번이나 보는 영화, 그것도 볼 때마다 감동이 더했던 영화의 장면 장면을 그렇게나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기도 허탈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엄마가 자기 물건 정리하시면서 넘겨준 편지 뭉치에 내가 어린 시절 잠시 어학연수 갔을 때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사근사근하고 알콩달콩한 모녀지간이 아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 속엔 전혀 내가 아닌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엄마와 다정한 친구라도 되는 냥 타국에서의 내 일상에 대해 재잘재잘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편지에 펼쳐놓은 여러 이야기 가운데는 내가 어떤 선배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여기저기 학원을 알아보러 다녔다는 내용도 있었다. 세상에나, 내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워낙 겁이 많아 남편이 모는 자전거 뒤에도 못 타는 사람이다. 그런데 심지어 타국에서 남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여기저기를 다녔다고? 게다가 오토바이를 몰았다면 남자 선배였을 텐데 도무지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기억 구석구석 여기저기를 뒤져도 정말이지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며칠간 온갖 인과관계를 추적하면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짐작은 해냈지만, 정말 내가 모르는 생소한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대체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것인지 헛웃음이 나고,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순간이었다. 하긴 일이십 년 후에 ‘지금의 나’를 내가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는 또 어떤 모습일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 모습도 어쩌면 그저 내가 믿고자 하는 지금 한 순간의 허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어느 늦여름 오후 산책길에서 아파트 단지에 피어 있던 자귀나무 꽃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난 저 아련함이 참 좋아’라고 느끼던 그 순간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 정말 아무런 맥락 없이 떠오른 어떤 기억의 파편 하나가 다른 기억들을 하나하나 끌어 모아 순식간에 완정한 스토리를 완성하면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무릎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아파왔다. 맛있어? 맛있지~! 하는 더없이 흐뭇하고 기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어떤 수줍은 눈웃음이 나의 온 마음을 점령한 것이다.


어~? 누구지…? 하는 순간 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그 교수님….


나는 모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정말 빡세고 빡세게 공부를 시키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다녔다. 당시 나는 동급생도 없이 거의 나 혼자 전공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어쩔 수 없이 전공 교수님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유달리 나를 귀여워하던 외국인 교수님이 계셨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으레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교수님은 한국에서 수십 년간 강사 생활을 하면서 나같이 특별한 여학생은 처음이라는 말씀도 하셨고, 석사과정을 마치면 모교로 돌아가 박사과정을 밟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하루는 수업 후 저녁에 시간이 있으면 자신이 잘 아는 맛집이 있으니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아무리 나에게 잘해주신다 해도 거의 아빠 연배의 교수님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학교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 어려웠다. 생선회와 어묵 등을 팔던 식당으로 기억하는데 교수님은 나의 양해를 구하고 술도 한 잔 하셨다. 나는 그런 자리가 몹시 불편하고 싫었다. 잔뜩 긴장한 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저녁을 먹었던 것 같다.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그 교수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 연락할 일이 있으면 당연히 집으로 전화를 해야 하긴 했지만 교수님이 직접 집으로 전화하신 것이 좀 의외였다. 교수님은 방학기간 해외에 있다가 돌아오신 듯,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2학기 수업이나 교재에 대한 말씀을 하시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자기가 아는 일식집에서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 집의 냄비우동이 자기가 먹어본 맛 중에 최고의 맛이라고도 하셨다. 사실 나는 뜨거운 것을 잘 못 먹는다. 게다가 여름철에 땀을 흘리며 먹는 것은 더 질색이다. 그래도 교수님이 사주시는 것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워 끙끙대며 먹었는데, 교수님은 자신은 막상 잘 드시지도 않으면서 내가 먹는 것만 지켜보셨다.


내가 산책길에 떠올린 그 눈웃음이 바로 그때의 그 눈웃음이다. 재삼재사 맛이 어때? 맛있지? 맛있어할 줄 알았어. 그렇게 확인하면서 흐뭇해하셨다. 막상 2학기 수업이나 교재에 대한 말씀은 한 마디도 없었고, 근황에 대한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도무지 교수님이 왜 집에까지 전화해서 나를 만나자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떤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내 마음속에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2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의식적으로 교수님을 피했다. 한두 번 정도 바쁘다고 거절한 것 같기도 하다. 박사과정 진학을 결정하면서 석사과정 졸업시험과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동시에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그때의 나는 잠잘 시간도 없이 바빴고, 교수님께도 그렇게 양해를 구했던 것 같기는 하다. 모교로 돌아와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아주 친했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석사과정 때 맺었던 인연들과는 점차 멀어졌고, 얼마 후 나는 두 학기 예정으로 해외연수를 떠나게 된다.


내가 연수하면서 머물렀던 대학의 연구원 기숙사엔 방에 전화가 없었다. 각 층의 복도 입구에만 전화기가 한 대 있었는데, 받기만 할 뿐 걸 수 있는 전화가 아니었다.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때마침 전화를 기다리던 누군가나 혹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전화벨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전화를 받고 전화 왔다고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보통 복도 끝에서 큰 소리로 ‘902’하고 방 호수를 부르는 방식이었는데, 설혹 방에 있더라도 그 소리를 듣기는 어려웠다. 어쩌다가 마음씨가 너그럽거나 시간이 한가한 사람이 전화를 받게 되면 그 방을 찾아가 노크하며 전화 왔다고 알려주기도 했지만, 다들 바쁜 생활에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전화벨은 혼자 울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언제 전화하겠다는 시간 약속이 사전에 되어 있지 않으면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연수 2학기 째에 접어든 어느 날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리며 전화받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사라졌다. ‘오~ 이런 일도 있구나’하며 신나서 나가 전화를 받아보니 석사과정 때의 그 교수님이셨다. 어?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아셨을까? 하는 의문이 잠시 스쳤지만 그간 안부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것도 죄송했고, 또 타지에서 전화를 받으니 반가웠다. 교수님은 여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들렀다고 하면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그때는 학교 선배나 교수님들이 방문하면 으레 호주머니 가난한 유학생들 불러다 맛있는 저녁이라는 한 끼 사주는 것이 미덕이었다.


내가 그 도시에서 연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교수님께서 맛있는 저녁이라도 사주시겠거니 했다. 교수님은 저녁 식사 시간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 시간에 자기가 묵고 있는 시내의 호텔로 오라고 하셨다. 나로서는 하루 오후와 저녁 시간을 다 써야 하는 약속이었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 보다 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객실로 오라고 하셨다. 보통은 호텔 로비에서 만나 차나 음식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떨떠름했지만 책 같은 것을 보여주실 생각이신가? 하고 억지로 불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학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철로 갈아타고, 또 페리를 타고 시내에 나가 호텔을 찾았다.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은 테이블 옆에 서서 뭔가 알약 같은 것을 삼키고 계셨다. 습기가 심한 날씨였는데 방 안에 가습기까지 틀어져 있어서 더 축축하게 여겨졌고, 습기에 약한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차를 내린 후 창가 의자로 나를 안내하셨다. 나는 빨리 그 방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또 바로 일어나기도 어려워 차를 마시며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 안부 몇 마디를 주고받던 교수님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조용했다. 이상한 느낌에 옆을 돌아보니 세상에, 교수님께선 졸고 계셨다.


아니 학교 기숙사에 전화까지 해서 만나자고 하시곤, 몇 마디 말씀도 안 하고 졸고 계시다니… 좀 어이가 없었고,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용기를 내어 ‘교수님, 피곤하시면 저는 그만 가볼게요’라고 하자, 민망한 듯 눈을 뜬 교수님은 만류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러라고 하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지 정신이 없었고, 그날 나는 기숙사 방에서 빵으로 늦은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그 교수님과의 불편하고 불쾌했던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다.


연수를 끝내고 귀국한 나는 결혼 준비에 박사과정 종합시험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다. 그 무렵 우연히 만난 석사과정 후배가 그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후라 조문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좀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후배는 그 교수님이 암을 앓고 있었고, 문상을 가보니 슬하에 자녀가 없다고 했다. 정작 나는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그 후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 교수님을 떠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마 그 불쾌했던 만남으로 교수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내 의식 안에서 사장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 산책길에서 아무 맥락 없이 교수님의 그 눈웃음이 떠오르면서 내가 놓치고 있던 어떤 많은 사실들이 갑자기 한순간에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연수중인 나를 만나러 오셨을 때 이미 많이 아프셨던 거구나. 그러니까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신 것이겠지. 그날 먹은 약은 진통제였겠구나. 그래서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졸게 되신 거였어.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졸게 된 자신에 대해 화가 나진 않으셨을까? 교수님은 내 연락처를 알기 위해 알음알음 얼마나 많이 묻고 다니셨을까. 나와 통화를 하기 위해 기숙사에 전화는 또 몇 번이나 하셨을까? 내 기억의 퇴적층 여기저기에 흔적 없이 묻혀 있던 기억의 퍼즐 조각들이 순식간에 와와 날아들어 하나의 완정한 그림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나를 보고자 하셨던 교수님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이 무엇이든 교수님에게서 언뜻언뜻 느껴지던 그 적적함과 쓸쓸함이 떠올라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너무 죄송했고, 내 마음 불편하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피해 다녔던 내가 너무 교만했던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나에게 까마득하게 잊혀져 있는 또 다른 마음은 없는가? 내 기억 깊은 주름 속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 올라와 나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끝 모를 회한에 사로잡히게 할 그런 마음 말이다. 나는 내 기억의 그런 횡포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철이 없어, 내가 교만하여 나도 모르게 허투루 여겼던 추억 속의 그 모든 마음 하나하나를 소환해 내고 마주 보며 어루만지는 그런 화해의 시간이 노년으로 접어든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