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관계의 비의秘意 : 엄마와 아빠

by 징졔

내 엄마와 아빠는 결혼식 날 초례청에서야 서로 처음 얼굴을 보았다.


양가는 두 분의 결혼이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엄마 쪽에서는 다른 집에서 사주단자가 오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집안 또한 아빠 쪽에 비해 많이 기울어서 혼인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께서 엄마 선을 보러 가셨을 때 엄마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빠는 20대 초반에 너무 무리하게 공부를 하다가 장결핵에 걸려 돌아가실 뻔한 후 기반을 못 잡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셨다. 심지어 결혼을 강권하는 할머니께 ‘어머니께서 정 그렇게 소원하시니 결혼식은 올리겠으나, 그 이후론 어머니가 데리고 사셔야 할 겁니다’라고 엄포를 놓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엄마 선을 보러 가는 날 이미 태몽을 꾸셨다.


외가는 집성촌으로 외할아버지 사형제 중 삼 형제 분이 담을 맞대고 살았다. 당시 엄마의 형제나 사촌들은 다 결혼을 하거나, 외지로 공부를 하러 나가거나, 혹은 나이가 어려서 엄마 혼자 집안일을 도울 적령기였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도 하고, 큰집 작은집 심부름도 하느라 결혼식 사흘 전에야 집안일에서 놓여나 신부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겨울철에 집안일 돕느라 튼 손등이 아무리 관리를 해도 며칠 만에 곱게 될 리는 만무했다.


첫날밤, 아빠는 발갛게 부어 있는 엄마 손등을 보고 평생 이 여자에게 잘해주리라 결심하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아빠는 정말 엄마에게 폭 빠지신 것 같다. 당시는 결혼식을 올린 후 신부는 한동안 친정에 머물다가(해묵이) 신행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 기간 아빠는 뻔질나게 외가에 드나들었으며, 며칠을 못 참고 엄마에게 안부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엄마가 얼마 전 내게 넘긴 아빠의 편지 뭉치를 보면 하나같이 ‘뵈옵고 싶은 그대에게 드립니다’,‘사랑하는 그대에게’,‘그리운 그대 보시옵소서’ 등으로 시작한다. 내가 태어난 후 객지에서 쓴 편지에는 ‘귀여운 우리 애기 엄마에게 드립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도 있다. 편지마다 어찌나 사랑이 절절한지, 난 흉내도 내지 못할 지경이다. 뛰어난 미인도 아닌 평범한 농촌 처녀에게 아빠가 어떻게 그렇게 처음부터 푹 빠졌는지, 난 아직도 수수께끼다.


반면 엄마는 좀 무덤덤하셨다. 당시 농촌에서는 음력설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집안의 며늘네, 딸네들까지 다 모여 대소가가 떠들썩하게 어울려 노는 기간이었다. 아빠가 오시면 엄마만 같이 어울려 놀지 못하니 엄마는 너무 자주 오는 아빠가 오히려 귀찮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빠는 외가에 오시면 온 마을에 소문이 짜하게 나도록 하루 종일 엄마 손을 붙잡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셨으며, 어떨 땐 어른들 눈을 피해 읍내 여관에 방을 정해놓고 몇 시간씩 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에 들어서 망정이지, 그전에 들었으면 아빠 보기가 좀 민망했을 것 같다.


엄마가 남편으로서 아빠를 신뢰하게 된 것은 아마 작은외삼촌을 대하는 아빠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은 선천적으로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외삼촌은 엄마를 무척 따랐으며, 엄마의 길게 땋은 머리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 외삼촌은 어른들 눈을 피해 새벽 일찍 엄마 아빠의 신혼 방 문을 벌컥 열기도 했는데, 아빠는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추우니까 어서 들어오라고 하여 엄마와 자기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누울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면 그 외삼촌은 두 분 사이에 누워서 엄마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고 한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느그 아빠가 참 고맙더라’라고 하셨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우주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 외삼촌은 엄마가 신행하고 난 후 누나를 찾겠다고 어른들 몰래 혼자 집을 나가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길을 잃고 객사하셨다. 미친 사람처럼 아들을 찾아 헤매던 외할아버지는 연고 없는 시신이 된 아들을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아마 가슴에 피멍이 드셨을 것이다.


엄마는 나를 너무 빨리 임신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신행을 하셨다. 엄마가 나를 낳을 때 아빠는 직장에 다니느라 객지에 계셨는데, 그때 아빠가 엄마께 쓴 편지의 한 단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다리던 산고를 겪으시고 얼마나 홀가분하오. 한 시간 여의 진통으로 순산하셨다니 고마운 일이오. 여아라 어머님과 당신이 함께 섭섭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인지 누가 아오.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로야 남녀 동권이 아니오. 출세하기로는 도리어 여자가 용이한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산욕을 겪으신 몸이라 부디 몸조리 잘하시오. …’ 아빠가 마치 나에게 보낸 편지 같기도 하다. 이 편지를 아빠 살아계실 때 읽었다면, 아마 아빠를 꼭 껴안아 드렸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아이 셋을 낳은 후에야 분가하셨다. 그때는 가세가 완전히 기운 상태라 엄마 아빠는 거의 맨손으로 분가하셨고, 맏이인 나는 할머니 손에 맡겨놓아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야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고, 곧 막내 동생이 태어났고, 아빠는 기반을 잡자마자 할머니를 모셔오셨다. 그렇게 자기 가정을 꾸린 아빠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가정적인 남편이었고, 엄마 아빠는 잉꼬부부로 주변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부부가 너무 금슬이 좋으면 오히려 안 좋다고 걱정까지 하셨다 한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엄마는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이 더뎠고 집안 살림 하고 아이 넷을 돌보느라 몸도 점점 약해지셨다. 내 기억에 처음엔 집에 수도꼭지가 고장이 나도 아빠가 회사에서 달려오셔야 했다. 아빠는 엄마가 낯선 도시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그야말로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빠는 회사에서 쓰는 금전출납부를 가져와 엄마에게 가계부 쓰는 법을 가르치셨고, 은행을 이용하는 방법을 안내하셨고, 심지어 아침에 출근하실 때 조간신문 어디 어디를 읽어놓으라고 숙제도 내셨다. 아침 설거지와 청소를 마친 엄마가 한자투성이 신문을 펴놓고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신문을 읽어 내려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아빠가 엄마보다 6살이나 많아서 가능했던 풍경이 아닐까 한다.


아빠는 엄격하셨지만 자상하고 다정하셨고, 엄마는 순종적이셨지만 무덤덤하셨다. 아빠는 늘 엄마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엄마를 배려하셨지만, 엄마는 그 무엇에도 심드렁하셨다. 외가의 딸네들 가운데 가장 시집을 잘 갔다고 주변의 부러움을 받았던 엄마는 자기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몸과 마음이 언제나 고단했다.


아빠가 뭘 하자고 해도 엄마는 심드렁하셨다. 아빠는 철마다 엄마랑 여행을 가고 싶어 하셨는데, 엄마는 멀미가 심해서 매번 고생하기 일쑤였다. 여행을 다녀오셔도 앨범에 사진 정리를 할 때쯤이면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도 기억을 못 해 아빠를 김새게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엄마는 자주 입맛을 잃곤 하셨다. 엄마 젓가락이 서너 번 이상 향하는 반찬이 있으면 아빠는 ‘오늘 참 귀한 모습을 봤다’고 좋아하셨다. 엄마가 40대 때 하도 자주 비실비실 기운을 잃어서 병원에 갔더니 병명이 영양실조였다. 아빠는 너무 창피해서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고 하셨다.


아빠는 가방끈이 길어진 자식들이 혹시라도 엄마를 무시하는 언행을 하지 않을까 엄하게 경계하셨다. 우리 형제 가운데 누구도 엄마에게 대들거나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아빠는 혹시라도 몸이 약한 엄마가 자기보다 일찍 세상을 등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셨던 것 같다. ‘당신 혹시 나 배신하고 먼저 가는 거 아니지?’하고 다짐받는 걸 나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엄마 환갑 해에 아빠가 먼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 4년 넘게 와병하다 돌아가시자 아빠는 엄마께 ‘막내 결혼시키면 1년 정도 데리고 살다가 분가시키고, 우리 둘이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 살자’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할머니 돌아가신 지 2년 반 정도가 지났을 때, 그러니까 막내 동생이 결혼할 무렵부터 아빠가 편찮기 시작하신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쯤 엄마가 잠깐 잠이 들었다가 기척에 눈을 떠보니 아빠가 어떻게 기운을 차리셨는지 엄마 곁에 오셔서 잠든 엄마 얼굴을 내려다보고 계셨다고 한다. 아빠는 ‘우리 결혼해서 4남매나 낳아 기르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나는 괜찮다. 이만하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셨단다. 엄마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덤덤하게 그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내가 아는 한 아빠는 한평생 엄마만 사랑하고 엄마에게만 충성을 바친 남자였다.


아빠가 돌아가시자 우리 형제는 비상이 걸렸다. 아빠 없이 엄마가 어떻게 사실까? 엄마는 아빠 없이 혼자서는 백화점 같은 데도 가지 않고, 심지어 외가에도 잘 가지 않는 분이셨다. 우리 형제는 엄마의 하루 24시간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과잉보호를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홀로서기를 시작하신 것이다. 혼자서 붓글씨를 배우러 다니시고, 도자기를 배우러 다니시고, 심지어 여든이 넘어서 코로나 사태가 터질 때까지 15년 넘게 아쿠아 운동도 하셨다. 시간이 걸려도 친구도 잘 사귀셨다.


그리고 건강해지셨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아빠랑 여행할 때마다 그렇게 엄마를 괴롭히던 멀미가 없어진 것이다. 엄마는 ‘느그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내 멀미를 가져가 버렸나 보다. 고맙게도’라고 하셨다. 엄마는 국내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80대 초반까지 해외여행도 무리 없이 하셨다. 아빠랑은 일본이나 타이완 같이 가까운 곳도 비행기 멀미로 곤욕을 치르시고, 심지어 호텔 방에 누워만 있다가 오시기도 했는데 말이다.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새롭게 발견한 엄마 모습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놀라운 엄마의 새로운 모습은 화투 치는 기술이 완전 타짜 급이라는 것이다. 어릴 적 기억에 가끔 엄마 아빠가 우리 형제들 데리고 윷놀이나 공기놀이, 다이아몬드 게임 같은 것을 했는데, 승부가 아슬아슬해지면 엄마는 흥이 폭발하곤 하셨다. 평소엔 늘 피곤하고 만사에 심드렁한 엄마의 표정이 삶에 대한 온갖 재미로 채색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승부를 가르는 게임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던 것이다. 스포츠 경기를 보아도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가 엄마의 관심의 초점이다. 심지어 주식 투자를 하지도 않으시면서 TV에서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으시단다. 엄마는 아흔이 되신 요즘도 하루에 한두 시간은 노인정에서 화투를 즐기시는데, 기술이 없는 할머니들과 화투 치는 걸 극혐 하신다.


또 알고 보니 엄마는 내면에 내재된 흥이 어마어마한 분이셨다. 때문에 코로나 발생 전까지는 엄마 모시고 노래방에도 자주 갔는데, 엄마가 노래방에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막춤까지 추는 모습을 아빠가 보신다면, 기겁을 하실까? 귀여워 어쩔 줄 모르실까? 참 궁금하기는 하다. 엄마는 70대에도 심지어 동네 친목계 친구 분들과 어울려 가끔 관광버스를 타기도 하셨다.


엄마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 편지에 답장하는 것에도 게으름을 부려 아빠로부터 ‘쯧’ 소리 듣기가 일쑤였으니까… 그런 엄마가, 여든이 넘으신 나이에 불경을 필사하고, 아흔이 되셨는데도 치매 예방한다고 매일 일기를 쓰신다. 그리고 작년 한 해에 읽은 소설만 해도 열 권이 넘는다.


엄마는 농담도 잘하시고, 큰 소리로 잘 웃으시고, 멋 부리는 것도 좋아하시고,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도 적극적으로 즐기신다. 알고 보니 엄마는 미식가셨다. 도무지 아빠가 볼 수 없었던 엄마의 모습인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이 모든 변화를 아빠라는 의지처가 없어졌기 때문에 홀로서기 위해 스스로를 긴장시켜서라고 설명하신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것이 진정한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는 내성적이지만 굉장히 자기 주도적이고, 타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취향이 분명한 캐릭터이다. 그런 분이 결혼하기 전에는 외할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느라, 결혼하고 나서는 아빠의 질서에 순종하느라 늘 무채색으로 사신 것이다.


난 엄마와 아빠가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좋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일단 큰 소리가 나는 부부싸움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늘 엄마가 아빠께 순종했고, 아빠가 화를 내실만 하면 엄마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대꾸를 안 해서 부부싸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빠가 그렇게 사랑과 관심을 퍼부어도 엄마는 그게 행복인 줄 알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어쩌면 한꺼번에 공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서 오히려 가슴이 갑갑하고 뻐근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늘 그렇게 피곤하고 나른하고 만사에 심드렁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니 마치 긴고아가 풀린 손오공처럼 자유로워지면서 건강해지신 것 아닐까?


대체 아빠가 사랑한 엄마는 어떤 여자였을까? 아빠의 사랑은 허상이었을까? 아빠는 결혼 생활 내내 외사랑을 하셨으면서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 생각하시면서 돌아가셨나? 난 참 오리무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예의범절, 도리, 책임, 체면 등의 윤리로 가득했던 아빠의 질서는, 방임, 편안함, 자유로움, 무심함과 상호 거리 유지를 추구하는 엄마의 질서로 바뀌었다. 기질적으로 아빠를 쏙 빼닮은 나는 가끔 엄마의 질서가 불안하지만,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편하기는 하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자기 주도적으로 아빠와 사랑을 하신다. 아침저녁으로 아빠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자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보, 참 고마워요’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신다고 한다. 나한테도 종종 ‘세상에 느그 아빠 같은 사람 또 없다. 나한텐 참 고마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엄마가 ‘지난밤 꿈속에서 느그 아빠를 봤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다. ‘그래? 아빠가 뭐라셔? 무슨 꿈이었는데?’라고 물어보면 엄마는 어떨 때 눈을 아스라이 뜨시고 ‘느그 아빠가 내 가까이 오는 꿈’이라고 대답하시기도 한다. 요 몇 년간 두세 번 정도 있었던 대화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몇 번 캐묻고 나서야 그것이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 아빠는 참 금슬이 좋은 부부이긴 했던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 엄마는 아흔 살 할머니치고는 건강하신 편이고 스스로 관리도 잘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으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아빠 사진을 보며, ‘여보 나 좀 빨리 데려가줘요’라고 혼잣말을 하신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가 다시 만나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만약 엄마가 30여 년간 자기 주도적으로 산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다시 아빠와 만나 부부가 된다면, 엄마 아빠의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변주될까? 어쩌면 아침저녁으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종국에는 헤어지는 부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빠가 엄마의 새로운 모습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될까? 그도 아니면 엄마가 활기차게 둘의 관계를 주도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존재가 관계를 규정하는 것인지, 관계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규정하는 것인지, 나는 그 철학적 논지를 감당할 수 없다. 다만, 존재와 관계의 가변성은 늘 설명되지 않는 어떤 비의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내 엄마와 아빠의 관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