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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Nov 07. 2024

텍스트 레터 01

불운이여, 이제 나를 현명하게나 해다오!

1월 20일 불운

모진 불운으로 앞날을 헤아리기 어려운 어두운 순간들은 내 인생행로의 걸림돌이 아니라 내가 올라서야 하는 내 앞에 놓여진 계단이다. 이 계단을 성큼 올라서기 위해서는 운이 좋다고 해도 실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햇빛이나 건강 따위에 매수되어서는 안된다.
한평생 어느 한 대상을 마주보고 있을지라도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전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일기』


대학 시절, 특수교육의 이해라는 과목이었을 것이다. 학기를 시작하는 초반 즈음 교수님은 '장애'와 '확률'에 관해 말씀하셨다. 장애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그저 확률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 수업의 다른 부분은 세밀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나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확률의 관점은 잊을 수 없었다. 장애를 겪게 되는 사람은 그 희박한 확률에 해당되는 것이고, 장애를 가지지 않고 지내게 된 우리들은 그 반대의 확률에 해당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 100명 중 5명의 확률일 때, 그이가 장애를 가지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 장애를 피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하셨던 것 같다. 100명 중 5명은, '나'일 수 있었고 곧 '다른이'일 수 있었다. 교수님은 장애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고자 했음이라 다시금 생각한다. 둔중한 울림이 왔다. 내가 피한 고통의 확률이 누군가에게…… 당도한 것이구나. 장애를 확률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 그 순간은 계속해서 나의 깊은 의식 속에 남았고, 그로부터 인생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주어지는 '운'과 그 이면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못'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다. '온전하고 말끔한 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에게, 무언가, 주어질 뿐인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때만이, 비로소 인생을 겸허하게 바라볼지 모른다.

만약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다스릴 수 있다 믿는 이들에게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삶은 예외로 제쳐둔 이에게도 기대해 본 적 없고 예상조차 불가능했던 불운은 노크도 없이 툭 다가온다. 그들이 그것을 다루어 갈, 인생을 향한 겸허함을 갖추지 않았다면, 재앙이 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이루어가기로 작정한 삶에 대해 오차 없이 완고했다.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이었고, 좋은 가정을 꾸릴 것이었고, 그들의 몸과 마음은 언제나 손상 없이 결합할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괴물로 여겨지는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들 인생의 실수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인생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혼란에 고통에 그로 인해 벌어지는 뼈아픈 상황들에 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들의 유일한 실수는, 자신들의 삶을 감히 무결하다 확신한 것이었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벤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녀는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그만둬, 헤리엇! 당신은 그 생각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몰라? 유대인 학살과 형벌, 마녀 화형과 분노한 신들!」 그는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희생양들」 헤리엇이 말했다. 「희생양도 잊지 마」
「수천 년 전부터 앙심을 품은 신들」 그가 마음속 깊이 불안해하면서 화가 나서 주장하는 것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처벌하는 신들. 불복종에 대해 처단을 하고 있어」
「하지만 이러저러하게 되리라고 결정한 우리가 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우리가 그렇게 한 거야.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우리는 우리가 믿고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졌어. 그리고……불운이 닥쳤지. 그게 다야. 우리는 쉽게 성공할 수도 있었어. 우리가 계획했던 그대로 될 수도 있었어. 이 집안에 여덟 명의 아이가 있고 모두들 행복해하는……. 글쎄, 가능한 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가장 재미있는 영화 혹은 소설 속 이야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신데렐라 이야기와 전락의 이야기. 계속 들어보았더니, 전락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고통을 기뻐하는 인간의 본성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을 보면 함께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이가 고통을 벗어날 때면 아쉬움과 섭섭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어두운 면이라는 이야기들로 연결되고 있었다. 나 역시 전락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소설이나 회고록의 주제에 '인생의 고통과 불운'이 포함되어 있다면, 무조건 읽어보리라 결심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이유의 결은 조금 다르다. 나는 베일에 휩싸인 '불운' 앞에 조신히 무릎을 꿇기 위해 전락의 이야기들을 찾아 읽는다. 내게는 두려우면서도 거대한 삶을 가장 겸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경험치인 것이다.

인생을 배워가는 모든 경험을 직접 할 수 없기에, 우리는 책을 읽기도 한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삶의 장면들을 찾아 읽어왔다. 결국 '불운'은 우리 모두에게 운명처럼 다가올 수 있는 확률의 이야기이며, 이것을 다루어 나가는 과정에는 분명한 성찰과 깨우침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무언가, 주어질 뿐인 삶의 원형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한 '불운'의 작용은 힘이 있을 것이다. 이 삶의 진리를 알아차리고 새로이 마주하는 나의 인생은 조금 더 단단해져 있지 않을까. 괴테의 시 '근심'의 마지막 구절, '나를 행복하게 놔두지 않으려거든 근심이여, 이제 나를 현명하게나 해다오'처럼. 가리지 않고 혹여 나에게도 당도한다면 불운이여, 이제 나를 현명하게나 해다오!라는 심정으로 용기 있게 주어지는 삶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정말. 이런 절절한 각오로 '불운'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 당시 내 나이 45세, 중년이 된 지 5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 가지 교훈들 중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망, 낙심, 비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절망, 낙심, 비극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게 커다란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고 깊게 트인다. 사람은 상실, 재난, 아픔, 슬픔 따위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맥스가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기 이전까지 절망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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