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파#

by 기림

“째깍째깍째깍째깍! 아 이런이런 늦었어늦었어! 죽기엔 너무 늦었고 살기엔 너무 바빠바빠바빠바빠바빠!”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토끼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을 되감으며 앞질러 뛴다. 회중시계를 옆구리에 찬 채 따라오라 손짓한다. 나는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토끼 굴 아래로 추락한다.


정신을 차리자, 사방이 막힌 거울의 방이다. 그 위에는 수백 개의 시계가 매달려 있고, 혀를 차듯 제각기 소리를 낸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린다.


어지러움에 쿵 하고 주저앉자, 방 안의 시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숨을 죽인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집요한 초침 소리. ‘째깍, 째깍….’

두리번거려 보지만 정체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더 날카롭게 파고든다. 거울 너머도, 천장 위도 아니다.

그 소리는 내 가슴 가장 깊은 곳, 두 번의 심장 수술로 인한 흉터 아래서 울린다. 낡은 판막 대신 들어앉은 차가운 기계 덩어리가 금속의 박자를 찍는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섬뜩한 금속음에 필사적으로 부정해 보지만, 거울 속 나는 수백 개의 모습으로 비웃을 뿐이다.


그때였다.

“아, 시끄러워. 박자 놓쳤잖아.”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위에서 툭 떨어진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리자, 천장 너머에 목이 긴 기린 한 마리가 심드렁하게 풍선껌을 씹으며 서 있다.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 기린…?”

“기린 처음 봐? 울 거면 박자에 맞춰서 울든가. 네 가슴팍에서 나는 그 소리, 아주 정교한 파#인데 말이지. 네 울음 때문에 자꾸 플랫(Flat) 되잖아.”

기린은 아주 시크하게 앞발로 자기 손목시계를 툭툭 친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머리 위로 휙 던진다.

“죽기엔 늦었고 살기엔 바쁘다며. 일단 눈물부터 닦아. 여기서 울고 앉아 있으면 맥박만 축나거든.”


기린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댄다.

‘째깍, 째깍.’

기린의 귀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거린다. 녀석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갑자기 앞발로 내 가슴을 툭 친다.

“야.”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살아 있네. 박자도 정확하고. 도,레,미,파 -파#.”

기린은 나를 힐끗 보더니 혀를 길게 내민다. 보랏빛 감도는 혀가 내 발치까지 쭉 펴진다. 기린은 혀로 나를 휙 감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제 등에 앉힌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진다.

“자, 내려다봐. 저 멍청한 시간의 민낯을.”


기린이 풍선껌을 '툭' 터뜨리자 일제히 거울들은 거미줄처럼 금이 가기 시작하고, 그 파편 사이로 여러 마리 토끼가 미친 듯 뛰어다닌다. 회중시계를 든 녀석들이다.

“늦었어! 늦었어!”

“바빠! 바빠!”

“살아야 해! 살아야 해!”

토끼들은 서로를 밀치고 넘어뜨리며 쉼 없이 달린다. 시계를 옆에 차고, 등에 업고, 부러진 시곗바늘을 끌어안은 채 더 빨리, 더 많이 움직인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내려다본다.

“봐. 시간이 쫓아오는 줄 알지? 아냐. 지들이 쫓아다니는 거야.”

기린은 목을 길게 빼더니, 고개를 뒤로 꺾어 내 얼굴 앞에 툭 들이댄다.

“멍청이들은 시간을 보려고만 해. 들을 줄을 몰라. 야! 넌 운 좋은 줄 알아.”

기린은 딱딱 소리 내며 껌을 씹는다.

“쟤들은 시계를 밖에 차고 다니는데, 넌 가슴 안에 품고 살잖아. ♬도레미파, 파 아- 째깍째깍”

기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춘다.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야, 꽉 잡아.”

기린이 풍선껌을 크게 분다. 주먹만 했던 껌이 얼굴만큼, 아니 내 몸통만큼 커지더니 ‘팡!’ 하고 터진다. 그와 동시에 기린의 목이 용수철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몸도 따라 오른다. 중력을 거스르는 속도에 나는 기린의 갈기를 꽉 움켜쥔다. 가슴속 기계 판막이 ‘째깍째깍’ 속도를 높이자, 기린이 크게 외친다.

“들려? 네 박자가 빨라지니까 세상도 같이 뛰잖아.”


기린의 등 위에서 본 세상은 더 이상 나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었다. 갈라진 거울 조각들은 은하수처럼 반짝이고, 그 위를 달리는 토끼들은 아득한 점멸처럼 흩어졌다.

“넌 그냥 네 박자만 믿고 힙하게 걸으면 돼. 잊지 마. 삑사리 나면 언제든 달려와서 튜닝해 줄게.”

그 말과 동시에 온 우주가 내 심장 박자에 맞춰 일제히 별빛을 터뜨린다.


그 찬란한 섬광 속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터져 나갔던 별빛들이 느릿하게 하강하며 익숙한 공기의 냄새로 변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집 앞마당이다.


방금까지 은하수를 가로지르던 그 기린은 마당 한구석 가로등 그림자처럼 길게 서 있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이상한 나라에서의 긴 여행을 조용히 받아낸다.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 덩어리가 이제는 나만의 고유한 박자가 되어 손바닥을 타고 뜨겁게 공명한다.

‘째깍.’

발밑에는 시간의 파편들이 건반처럼 맺히고, 나는 그 위를 한 음씩 밟아 나간다.


‘도,레,미,파, ㅡ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