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그때는 내가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16시간 30분의 진통 끝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 이미 혈관은 다 터져 있었고, 체력은 바닥나 있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겨우 입을 열었다.
“아기는… 건강한가요?”
“네, 아주 건강합니다. 공주님이에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던 나는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집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비보가 날아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마치 당신의 생명을 아이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신 듯했다.
삼우제 날이었다. 부모님은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나를 맡기고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누워 있는 내게 물었다.
“애기엄마, 필요한 거 없어요?”
“네 없어요, 괜찮아요”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불과 2, 3분이 지났을까. 다시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린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방으로 들어온 아주머니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그 등 뒤로 복면을 쓴 남자가 식칼을 앞세워 그림자처럼 따라 들어왔다.
괴한은 내 목에 칼날을 겨누며 꿇어앉으라고 했다. 그는 전화기 선을 거칠게 끊어내더니, 내 손목과 발목을 뒤로 꽁꽁 묶었다. 살을 파고드는 통증보다 더 끔찍했던 건, 아이를 감싸던 부드러운 천 기저귀가 내 눈을 가린 순간이었다. 세상의 빛이 단절되었다.
옆에서 들리는 아주머니의 거친 숨소리와 흐느낌만이 그녀 또한 결박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어둠 속에서 오직 소리에 의지해 다가올 공포를 견뎌야 했다.
조금 전까지 내 품에서 젖을 빨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던 아이, 나의 분신.
아이가 울면 괴한의 칼끝이 향할까 두려웠고, 울지 않으면 이미 늦은 건 아닐까 무서웠다.
미친 듯 날뛰는 내 심장 소리가 아이의 숨소리를 덮어버릴 것 같아, 그 박동조차 겁이 났다.
침착해야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우린 다 끝이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렸고, 외할아버지께 도와달라 빌었다. 그리고 곁에 누운 아이에게 약속했다.
‘엄마가 널 지킬 거야.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남자는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생각나는 대로 패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아주머니를 방에서 끌고 나갔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가구를 뒤엎는 소리, 집이 통째로 흔들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 명인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부터 평창동에 도둑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CCTV나 세콤 같은 무인 경비가 없을 때였다. 동네 주민들끼리 비상벨을 달자고 모의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리모컨을 누르면 동네에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차가 출동한다. 주민들의 실수로 여러 번 소동이 있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문갑 위에 있던 비상벨 리모컨.
하지만 괴한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나도, 칼날이 날아들 수 있다. 눈가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이다.'
2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당겨 손목을 억지로 빼냈다. 눈을 가린 천을 벗어던지고 발목의 줄도 걷어냈다.
몸을 끌다시피 문갑을 향해 기어갔다. 그 몇 걸음이, 16시간의 진통보다도 멀고 험했다.
마침내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리모컨이 잡혔고, 나는 힘껏 버튼을 눌렀다.
사이렌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날카로운 굉음이 평창동의 고요한 공기를 집어삼켰다. 그 소리는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외침이었고, 아이를 지키겠다는 어미의 포효였다.
그 소동 속에 괴한들이 달아나는 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가장 먼저 아이에게 달려갔다. 떨리는 팔로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아이는 버텨주었다.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던 공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아주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경찰들 앞에서 놀라울 만큼 차분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사건의 경위를 하나하나 말해나갔다.
“어쩌면 이렇게 침착하세요? 다른 사람 같으면 이렇게 못했을 텐데.”
경찰의 물음에 나는 말을 삼켰다.
침착했던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었을 뿐이다. 내가 무너지면 이 작은 생명도 끝난다.
그 생각이 나를 냉정하게 붙들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물러나자, 아이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말아쥐었다. 그제야 참아왔던 눈물이 마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1994년 11월.
나는 그날, 아이와 함께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