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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Sep 02. 2023

금쪽같은 유전자


 “해빈아 해빈아 금쪽이 유전이래”

함께 TV를 보다가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간 딸아이를 깨우며 말했다. 해빈이는 벌떡 일어나 “유전이래? 정말? 그래? 음-” 한다.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요즘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를 자주 시청한다. 지난번에는‘아기로 살아가는 난독증 초4 딸’의 사연이 공개되었다. 또래 친구보다 읽는 속도가 느리고 발음도 이상하고 간단한 문장조차 건너뛰는 아이에게 오 박사는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금쪽 사상 최초의 일이다. 금쪽이와 금쪽이 아빠 단둘이 멕시코 식당에 갔다. 아빠도 한글 메뉴를 잘 못 읽는다. “나도 어렸을 때 난독증이 있어서”라며 딸에게 넌지시 과거의 아픔을 고백하고는 “나를 닮을 것 같아 미안해”라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오 박사는 부모 중 한 사람이 난독증일 때 46%의 발병률이 있다고 말한다.    

  

큰딸은 공부량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왔고 해빈이는 노력에 비해 잘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 시험 볼 때마다 되풀이되는 하소연이다. 흐느껴 울기도 했다. 특히나 국어시험이 그랬다. 지문을 읽다가 시간을 다 써버린다고 했다. 인과관계에는 화살표로 표시했고 문법을 하나하나 따져야 하는 수고가 따랐다. 나는 해빈이가 머리가 나쁜가 생각했다. 논술학원에 등록했다. 성실한 아이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수리논술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매우 놀랍고 신기하고 대견했다.

이따금 우리는 우리의 닮음을 이야기한다. 해빈이는 자기의 노력을 과시하고, 질세라 나도 노력형 인간이라고 말한다. 엄마는 음악을 전공하며 악보 보는 게 어려웠는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더니 잘하게 되었다. 우쭐댄다.

나는 책 읽는 것도 힘들다. 독해도 어렵지만 해독은 더 어렵다. 학창 시절에는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형제와 비교당했고 딴전을 피운다고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다. 커서는 친구로부터 오해도 샀다. 청각에 이상이 있나 병원도 찾았지만, 검사결과 그 누구보다 청력 상태가 좋다. 시력이나 청력,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이라는 가능성에 곁눈질로 시작된 탐색은 본격적인 탐구로 이어졌다. 난독증(dyslexia)의 어원은 ‘dys(서툰) + lexia(읽기)’ 로 된 그리스어다. 음소의 나눔이 서툰 사람들은 음운 인식의 구별이 안 된다. 예를 들어 보통사람은 ‘곰’이라는 말을 들으면 ㄱ,ㅗ,ㅁ 3개의 음소를 기반으로 글자를 음성으로 바꿔 그 의미를 떠올린다. 그런데 난독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음소 구분이 어렵다. 이를 ‘음운론적 취약성’이라 하는데, 정보처리 과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체 인구의 5~10%가 난독증을 앓고 있고 영어권이 많다. 일란성쌍생아의 경우 둘 모두의 경우 70%이다. 가족력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신경 체계의 문제라는 연구결과다.    

  

떠올려보니 친정엄마에게도 나타났다. 매사에 열심이고 잘했던 엄마이지만 두세 페이지 이상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한자(漢字)에는 능했다. 붓글씨로 써 내려간 병풍이 집안 가득하다. 그림처럼 뜻과 소리로 만들어진 한자는 수월했던 모양이다. 아빠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엄마에게 못 알아차린다고 면박도 많이 주었다. 엄마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저리다.     


요즘 나는 교육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한다. 같은 반 문우가 사회적 이슈와 선과 악을 다룬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나왔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놓치기 싫었다. 최대한 단시간에 신경을 곧추세워 읽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집에 와서 차근차근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더 묻고 싶고,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번졌다. 입문반을 거쳐 심화반에 갔을 때는 심도 있는 토론과 밀도 있는 합평을 기대했다. 미리 글을 받아볼 수만 있다면 풍성한 나눔이 될 수 있으련만, 제안도 하고 부탁도 드려봤지만 소용없다. 문인 중에는 난독증은 없을 것이다.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책상머리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인지 변화를 귀찮아한다. 섭섭하고 야속한 마음 이렇게나마 나를 달랜다.     


난독증이 있는 유명인들 가운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월트 디즈니, 파블로 피카소, 스티븐 스필버그, 톰 크루즈 등이 있다.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논리를 관장하는 좌뇌가 결핍을 커버하기 위해 우뇌를 발달시킨다.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더 깊은 생각으로 인해 잠재력을 깨운다. 난독증이 오히려 천재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난독이 많은데 부각이 되지 않은 건 약점을 숨기려 하는 풍토와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인식 때문이다. 

    

바꿀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은 즐기라고 했던가. 나중에 해빈이에게 어떤 말을 들을까 궁금하다. 엄마 때문에 사는 게 피곤하다고 말할까, 아니면 급변하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은 갖지 못하는 금쪽같은 유전자 때문이라고 할까. 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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