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스망 존재론 유감
학문의 토대를 이룩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의 언어는 '그렇게 하자'라는 묵시적 약속이 근본이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없는 무한시성의 약속은 지속성을 담보하지 않기에 침식을 거듭하여 '그렇게 하자'에서 '그래야만 할까?'라는 의심이 확장되어 동시성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비논리가 아니며 두 명제가 상호 진리처럼 상충하는 이른바 이율배반적 현상이다.
철학적 견지에서 인간들의 언어란 별도의 확장된 해석을 필요로 하는 텍스트(text)이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문맥을 의미하는 콘텍스트(context)의 이해가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해석에 재해석을 거듭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어에 중의적 의미가 있거나 문맥상 어감을 달리하는 경우라면 해석을 거듭한들 합의점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논리적으로 명제(命題)란 그 뜻이 자명한 문장을 말하니, '참' 이나 '거짓'임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값'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허접한 정의 인지를 확실히 지적하고 있는 무한루프가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명제가 주장하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즉 '이 문장이 거짓이다'라는 게 사실이므로, '이 명제는 거짓'이라는 기묘한 결론이 된다. 만약, 이 명제가 거짓이라고 한다면 이 명제가 주장하고 있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 라는 것은 거짓이다. 즉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게 거짓이므로, '이 명제는 사실'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는 이 결론을 이끌어낸 '이 명제가 거짓이다'라는 전제와 모순된다. 말하자면, 무한으로 순환하는 루프에 구속된 답이 없는 논리적 말놀이의 정수가 틀림없다.
이 내용은 논리학 분야에서 만큼은 대단히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로서 철학자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과학적으로 레이아웃(Layout)이란 경계를 포괄하는 전체의 배치를 뜻하지만, 철학적 해석으로는 종종 상황(circumstance)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일부를 포함하는 전체'라는 의미의 레이아웃이 '주변의 상황'으로 재해석 수순을 밟아 프랑스로 넘어가면 전체라는 의미가 쇠퇴하고, 아장스망 (Agencement)으로 와전되어 '재배치'나 '재포설'이라는 뜻으로 전이가 된다.
20세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극찬한 질 들뢰즈(1925-1995)의 재배치 생성론은 '아장스망 존재론'을 구성한다. 들뢰즈의 생성론을 요약하자면, 창조란 없음(無)에서 있음(有)으로의 변화이고, 생성이란 있음에서 있음으로의 변화를 말하기에 ‘없음’이란 착각에 불과하다는 명료한 구조체계를 지닌다. 들뢰즈의 '아장스망 존재론'이란 있음에서 있음으로 전이되어 연속되는 재배치를 의미하므로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들뢰즈의 견해에 대하여 헛소리금지 내지는 말장난으로 규정한 비트겐슈타인 학파와 비로소 개싸움을 시작한다.
설명할 수 없다면 그만 입 닥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 대하여 들뢰즈는 현저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언어와 현실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들뢰즈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언어를 단순한 도구로만 취급하여 현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고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무시하고 언어를 정적이고 단순한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날 선 비판을 가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게임의 일부로 이해하여 언어의 의미를 게임의 규칙에 따라 정의했다.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이 현실의 다양한 측면과 복잡성을 감소시키고 무력화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들뢰즈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현실과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언어와 현실의 복잡성을 인정하여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죽하면 "비트겐슈타인 학파는 모든 철학의 퇴행이다. 그들은 철학의 암살자이다. 추악한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말것이다" 라는 독설로 언어 철학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참신하다. 언어란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 제약이 있으며, 언어의 이해는 우리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에 제한적이라는 주장을 강조한다. 즉, 언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일부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개싸움은 그렇게 끝이났다.
사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비록 사자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는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자의 경험과 문화적 배경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자는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종류의 사회적 구조와 의사소통 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언어와 소통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인공지능이 인식하는 언어체계나 외계 생명체 언어의 소통을 비트겐슈타인의 사고실험에 대입할 수 있다. 만약 우주에서 발견된 외계 생명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언어와 의사소통 방식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벗어날 수 있으며, 그들과 소통이 불가함은 자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와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중요한 사고 모델을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들뢰즈의 아장스망과 완벽히 상반되는 개념이다.
사자: 나는 니들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 잡아먹지 않을 수 있도록 악랄한 인내를 해보마!
인간: 뭔 개 소리야 인마!! (들뢰즈)
사자: 니들 언어의 한계가 곧 니들 세계의 한계지?
인간: 그건 내가 한 얘기야 인마!! (비트겐슈타인)
사자: 좋아! 그렇다면 VS는 뭔가?
인간: 그건 Versus의 준말이지. (들뢰즈)
사자: 틀렸어! VS는 '붙어보자 씁새야!'의 준말이지. 그것도 모르냐? 이런 미친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