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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un 24. 2024

기억이라는 거짓말

본능을 억제하는 풍선 효과에 대하여

"저 임신했어요..."

"축하드려야 할 일이 생긴 거 같군요..."

"놀라지 마세요, 당신의 아이랍니다."

"헉...!"


  이것은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하는 대화가 아니라 실화의 한토막이다. 남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였기에 두 사람은 결국 법정 다툼으로 진위를 가려야 했고, 의아하게도 여자의 일방적인 패소였다. 사건기록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자의 증언은 놀라울 만큼 사실적인 묘사로 남자의 아이가 확실하다는 근거를 주장하였고, 수사팀에서는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하였다. 여자는 물증으로 CCTV 녹화물을 비롯한 두 사람의 동선은 물론이고 사건을 세세히 기록한 일기장을 포함하여 각종 유의미한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거짓말 탐지기에서 반응이 없음을 인지한 수사기관에서는 사실관계에 생물학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진단결과 여자는 실제 임신상태가 아니라 상상임신이었다. 더구나 남자는 정관수술을 주장하였기에 심층조사를 실시한 결과 무정자 상태로 가임조건 불능상태였다. 이게 도무지 어찌 된 일일까?


  기억을 연구하는 뇌과학 분야나 심리학 분야에서는 놀랍게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사람의 기억이 종종 사실과 달라지고 바뀔 가능성을 지적해 왔으며, 수많은 논문과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이를 오정보 효과(misinformation effect)로 명명했다.

  객관적 사실로 인간의 뇌는 있는 그대로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방어기제의 억압(repression)과 의미가 상통하기는 하나, 기억을 연구하는 인지심리학 분야에서는 방어기제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리한 억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현대의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특이한 현상을 방어기제에 의존하지 않고 장된 기억이 왜곡되어 종종 한다는 것을 꾸준히 논의해오고 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플래시백' 널 증후군이 있을 경우 망상증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소견도 있다.


  명백히 사실이 아닌 가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기억되 표상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를 수 있다. 이러한 오기억 현상은 이 분야의 심리학자들을 상당히 매료시켰고,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결과에 의하면, 허접하게도 인간의 기억이란 단지 그것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기만 한다면 연결고리가 미묘한 단어의 선택이나 감각을 동원한 분위기,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의 간접적 증언만으로도 사진처럼 생생한 가짜 기억을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스러운 기억의 파편들 조각으로 호출하여 조립내는 최면술은 양날의 검처럼 위험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가혹한 고문은 기억을 통째로 왜곡시키므로 대단히 위법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설계결함은 장기기억의 뒤틀린 왜곡이나 단기기억의 인지오류(認知誤謬) 뿐만이 아니다. 완벽하다고 믿는다는 추정이나 추론 그 자체가 곧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 있다.

  파스칼의 추론마냥, 그대와 나는 생각하는 갈대도 아니고, 메커니즘을 지닌 생화학적 생존기계도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반복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실존의 객채일 따름이다.

  세상의 숱한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거든 완전하거나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음이 타당하다. 어차피 사피엔스는 생기다만 결여태(缺如態)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특히 페르소나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기억이란 언제고 왜곡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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