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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갑인가...?

나는 을이다. 너 죽고 나 죽자!

by 하이경

과거의 형식지 이론만으로 성취한 경험과 그 기억에 지배된 사람들의 성향은 애석하게도 예측불허의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다. 오로지 간접 체득해 온 지식이나 태도의 한계가 분명하고, 문명의 혜택으로 하여금 몸을 쓰는 노동 의지를 상실한 탓도 있을 것이다. 더우기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봉착하여 자력으로 탈출해 본 기억이나, 시행착오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연재해나 돌발사고 여파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지식인들 대부분이 굶어 죽거나 정신착란으로 뇌구조가 망가지는 까닭은, 생존본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예 생존지능이 거의 전무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엄밀히 짚어보자면 컴퓨터에 의지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그들이 지닌 능력이라야 고작 컴의 자판을 두들겨 구글링으로 정보에 접근하는 것 외에는 생존에 관한 한 아무런 능력도 보유하지 못한 어린이와 흡사한 이유 이기도 하다. 비록 그들은 악랄한 취미인 낚시 도구를 다루는 것에 능숙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도구 없이 맨손으로 고기를 잡거나, 날짐승과 들짐승을 사냥하여 내장을 갈라 섭취 가능한 고기를 만들거나, 땔감을 패고 불을 피우는 요령마저 TV나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하여 남 얘기처럼 멀뚱히 간접 경험을 했을 따름이다.

즉, 원초적 (본능이 아닌) 생존에 관한 한 모든 것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극한 상황이 닥치면 가능하다고? 천만에, 웃기는 상상에 불과한 얘기다.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생존이란 표현처럼 쉽지 않다. 닭이나 돼지를(죽여) 잡아본 경험도 없이 거의 매주 치킨이나 삼겹살 따위의 단백질을 섭취하면서도 개고기를 취하는 이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혹여, 그들을 경멸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식 습의 행위는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며, 처한 상황의 환경적 요인이거나 문화적 차원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 개고기 섭취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부득이 생존을 선착순으로 앞세우자면 닭도, 돼지도, 개도, 고양이도 법적으로는 전부 가축에 불과하다.


혹여, 재수 없이 무인도에 봉착한 상황이라면 문명세계인 육지와 달리 생존의 칼질 끝판왕인 식당아줌마와 상류층에서 거들먹거리던 귀부인 계급은 완전히 뒤집혀, 갑과 을의 위치가 와전되고야 말 것이다. 제 스스로 먹이를 포획하거나 평생 칼질을 못해 본 그러니까 심지어 고등어 내장을 다듬어 먹을 수 있을 만큼도 칼질을 못하는 그대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하여 질문을 하자면, 그대는 지금 갑인가? 을인가? 아니면 슈퍼 병인가? 물론 지금의 시대에는 울트라 슈퍼 '정'도 있고, 노숙자인 '무'도 있으며, 나는 놈 위에 편하게 붙어가는 빈대라는 '기'도 있다. (아니! 계급으로 나누자면 무, 기는 물론이고 경, 신, 임, 계까지 있다.)


적어도 당신이 갑이라면, 을인 불특정 다수를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는 약속은 있어야 하고, 을인 당사자들도 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협조하고, 그에 따른 결과물을 병과 공유하여 공출상납을 약속하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 즉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한 상호확증협조 관계를 약속하고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 장원제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기회균등이나 호혜평등의 준칙과 법리로 잘 정비된 현재의 세계관이라고 한들 중세 장원제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지 실은 경계가 애매하기만 하다. 혹여 두 세계관의 유전자가 99.9% 동일하기 때문은 아닌지 거듭 의심해봐야 할 일이다.

처한 상황이 육지이건 무인도건 적어도 생존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기꺼이 을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갑도 을이나 병과 더불어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암묵적 협약을 함부로 파괴하는 갑질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을질도 존재한다. 매우 치명적인 을질을 일컬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전략인 상호확증파괴의 엉터리 전략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갑과 을은 언제라도 위치가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잔망스럽게도, 인류의 역사란 상대를 죽이고 살아서 남아있는 자들의 기록이며 그들의 몫이자 또한 나머지다. 그러니 잔잔해 보이는 아사리 판에서 생존한 지금의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고, 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혹여, 당신이 을의 처지에 위치한 입장이라면 갑질을 일삼는 갑을 제압하여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경우 함부로 갑이 제안하는 협상에 임하면 오히려 큰일을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니, 반드시 당하고야 말 것이다.

배신에 능한 갑의 알량한 도덕성이나 양심에 털이 나있는지의 여부를 함부로 저울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잉카 문명을 초토화시킨 스페인 왕국의 정복자 프란치스코 피사로의 입장과 흡사하다. 그는 신대륙의 원주민과 거짓 평화협상을 치르고 목적한 황금을 몰수한 다음 그들의 수장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켰다. 그러나 같은 편이던 주변의 질투와 시기를 포함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피사로는 졸지에 갑에서 을의 입장으로 바뀌어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인간적인(?) 배신의 암살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인류 역사를 거슬러 더듬어 보자면, 피사로에게 닥친 개 같은 경우는 사뭇 조족지혈에 해당한다. 그래서 기억해야 한다. 모든 명예든, 부귀든, 영화든, 권력이든, 인과응보는 인류의 역사에서 별반 오차가 없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호확증파괴는 이른바 물귀신 작전으로 통하는 벼랑 끝 전술이다. 내가 너를 이기지는 못하지만, 너랑 나랑 같이 죽자는 식으로 따지자면 현대전에서는 '핵버튼 전략'으로도 통한다. 쏴봐라! 네가 누르면 나도 누른다!


이 나라의 지속성은 나처럼 방구석에 옹크린 비겁한 자가 아니라, 밖으로 뛰쳐나가 악을 쓰고 있는 그들이 포도시 지탱하고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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