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해본 자들의 고통

by 하이경

회사마다 추구하는바 사훈이 있듯, 국가 이념이나 정책의 기본방침 또는 지향하는 바의 함축된 의미를 담은 문언 표어를 모토(motto)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모토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회자된다. 초창기 중앙정보부(국정원)의 모토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어쩌고로 시작하여 공화국 정권이 몇 번 바뀌더니만 '소리 없는 헌신'이었다가, 지금은 어떻게 변하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고 또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다. 물건너에 있는 유한회사 구글의 모토는 '악랄해지지 말자!' 라니 여차하여 삐끗하면 더욱 악랄해질 수도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도 같기에 다소 끔찍하다. (으윽! 이 나쁜 넘덜 내 비밀번호 관리는...?)


혹여, 스위스라는 나라의 모토를 들어본 적은 있으신가? 아직껏 못 들어 봤다면 지금 듣는 것이 이롭다. 그건 바로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대책 없이 믿었다가 추접한 꼴을 많이 당해본 민족들의 공통적인 견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럴지는 모르되, 스위스의 제네바라는 도시는 신뢰도, 활력도, 젊음도, 광채도, 심지어는 영혼까지 거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도시다. 이 도시가 지닌 최대의 장점은 빡! 하고 쪼개질 만큼 거리가 깔끔하고 청결하다는 것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국민들 역시 깔끔하고 성실하지만 이들은 도대체가 무덤덤하고 지독히 보수적이다. 농담이 아니라 무려 1970년대 까지 이 나라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지만 도무지 정치라는 작태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얘기다.

스위스 정부는 직접민주주의 내각책임제로 대통령이 있건만, 국가원수로서 국제회의만 참석할 뿐 허수아비 행정수반이고, 그렇다하여 총리에게 국정 권한이 있느냐 하면 전적으로 그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이 나라는 뭐냐는 물음에 답을 하려면 2박 3일이 걸린다. 당해본 사람들의 억울한 역사를 열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지럽지만 이장이 군수보다 권한이 많고, 군수가 총리보다 권한이 막강한 나라다 보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지 않으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장작 패는 작업을 남에게 하청을 주거나 자력으로 해결하려면 공법을 달리하여 도끼 사용을 피하면 된다. 허나 보유한 자원 문제로 앞서 제시한 하청이나 공법 변경의 여건이 안 되는 상황일 경우라면 사용하려는 도끼를 믿지만 않으면 발등이 찍힐 염려는 없다. (하지만 절대 조심하지 않으면 발등을 찍힌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실체를 의심하여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름 악랄한 배신을 경험한 기억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서로 신뢰성을 상실한 도시라면 황량한 사막과 다를 게 있겠는가?


해 떨어지면 쥐들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뉴욕의 할렘과 스위스 제네바라는 도시는 도저히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미국인보다 총기 소유자가 훨씬 더 많은 스위스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쥐 대신 무엇을 대입하면 서울의 여의도와 견줄 수 있을까? 허튼짓이다. 사람의 천적은 오직 사람이기 때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국은 나침반을 잃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