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어(死語) 판 잔혹 콩트 : 제 기만(欺瞞)에 스스로 속다.
이경은 동물 보호소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은 안정적이었으나,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강 교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개는 논문을 파각하지 않네!!" 그 말은 단순히 책망(責望)이 아니라, 모든 '예기치 아니한 우연'을 적극 부정하는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박사 과정을 중퇴한 이유를 설명할 때, 늘 모호(模糊)하게 얼버무리곤 하였다. 하나 내심, 이경은 자신의 반려견 마루(Marru)의 죽음을 변명으로 차용(借用)했다는 강 교수의 냉정한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마루가 하드디스크를 물어뜯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논문 실패의 궁색한 변명일 따름이라는 강 교수의 대찬 판정이 이경에게 더할 나위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어느 날, 이경은 우연히 동료들과 함께 보호소의 후원자를 위한 감사(感謝) 영상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경은 자신의 학력과 과거사를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50대 중반의 선한 인상을 지닌 여성으로 수의사를 겸직하고 있던 보호소 소장(所長)은 그를 영상제작의 핵심 인물로 연출(演出)하고 싶어 했다. 소장은 후원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이경의 스토리텔링을 다소 각색하기로 결정했다.
영상 촬영당시 소장이 카메라 앞에서 언급하기를, "이경 씨는 사실 촉망받던 수의대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학비 때문에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과로로 중요한 논문 자료가 담긴 외장 하드를 통째로 날려버렸대요. 그 좌절감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실수로 희생될 뻔한 유기견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답니다. "
촬영 현장을 목도(目睹)하던 이경은 소장의 각색된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수의대생이요? 과로요? 하드디스크를 날려버렸다고요...? "
이 언급은 명백한 허위(虛僞)였다. 하지만 이경은 소장의 선의(善意)와, 보호소 후원금을 모으려는 절실한 의도를 인지(認知)하였으므로 즉시에 반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각색된 스토리는 그의 비극을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통제 불가의 우연에서, 헌신적 과로라는 미화된 희생의 필연으로 반전(反轉)시키고야 말았다.
소장의 하얀 거짓말은 동물의 생존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동물애호가를 위시하여 다수의 후원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보호소 운영을 위한 기부금은 창설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마침내 보호소는 오랫동안 염원(念願) 해오던 고가의 첨단 의료장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많은 유기견들이 소장이 허위로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에 힘을 입어 실질적인 의료구제의 도움을 받았고, 보호소는 예전보다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경은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거짓말'로 인하여 적지 아니한 가엾은 생명들을 구원했다는 사실 앞에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소장이 꾸며내고 각색한 이야기를 '거짓말의 제곱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거짓말은 강 교수에게 했던 변명, 즉 '개가 논문을 파각했다'는 것이 세상의 냉혹한 논리 앞에 완벽한 거짓으로 간주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거짓말의 함의(含意)는 표면상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 결과는 진실보다 더 강력하고 현창(顯彰)한 선(善)을 창출해 냈다. 이경은 깨달았다. 강 교수가 말한 진실은 논문의 결과였지만, 소장이 만들어낸 백색(白色)의 거짓말은 의외의 상황으로 변질되어 최선의 결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강 교수의 강직(剛直)한 목소리는 메아리의 여운처럼 점차 함몰(陷沒)되어 갔으며, 그동안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강 교수의 냉혹한 현실적 판단에 더하여 이경의 중복된 판단은 "거짓말이 선의의 결실을 낳는다면, 그 거짓은 거짓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라는 모순된 합리성을 내포한 거짓말로 서서히 환치(換置) 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경은 더 이상 자신이 논문을 실패한 이유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수의대생이 아니었지만, 이제 유기견을 구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새로운 거짓말은 그에게 더 이상 죄책감이 아니었고, 오히려 유기견들을 헌신적으로 돌볼 수 있다는 이유가 선명한 동기이자, 과거의 상실과 고통을 덮는 치유현상으로 변해갔다.
그날 이후, 이경은 촬영 카메라 앞에서 수의대생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는 상상이 빚어낸 이 거짓말의 제곱근을 통하여, 비로소 강 교수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순수한 '선의적 의도'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또한 자위적(自爲的) 구원을 받게 되는 기이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경이 수의대생 출신으로 유기견 봉사에 헌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보호소의 유명세를 급상승시켰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어 재정적 결실을 넘어, 이경 개인에게도 예상치 못한 명예를 선사(膳賜) 받게 되었다. 어느 날, 이경은 지역 방송국에서 '숨은 영웅'으로 선정되어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인터뷰 당일, 이경은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아 '과로(過勞)로 하여금 학위논문을 날리고 학업을 포기한 수의대 대학원생'으로서의 각색된 이야기를 반복했다. 인터뷰가 끝난 직후, 방송국 관계자가 이경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경 선생님, 실은 저희가 선생님의 사연에 크게 감동해서 지역 수의사 협회와 논의 끝에 선생님을 '자랑스러운 수의학도상' 특별 수상자로 추천했습니다. 시상식 때 짧은 연설을 부탁드립니다. "
이경은 숨이 턱 막혔다. '자랑스러운 수의학도상'이라니! 이것은 소장이 꾸며낸 선의의 거짓말을 완전하고 공식적인 사실로 견고하게 굳히는 행위와 진배없었다. 명예는 이유 없는 유혹처럼 달콤했지만, 그것은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위태로웠다. 그는 수의학과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가 쿠킹에 동조한 것은 허위의 결과물인 사실적 후원금이었지, 거짓 그 본체(本體)는 아니었기에 정중하게 거절하려 했으나, 보호소장은 이미 이 소식을 사전에 자원봉사자와 보호소 임직원들에게 알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경은 거짓이 낳은 선의의 결과를 수호(守護)하려는 목적으로 당초에 원인을 제공한 공범(共犯)으로서 기꺼이 멍에를 짊어져야만 했다. 시상식 행사당일, 이경은 평생 처음 입어보는 턱시도를 차려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는 준비한 연설 대신,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담아 매우 애매모호한 내용의 연설을 했다.
"저는...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의 고통을 변명으로 삼으려 했죠. 하지만 세상은 변명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결과만이 중요했죠. 다행히 저에게는 그 결과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쓰일 기회로 주어졌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이 과분한 상은 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저의 나약함과 상실이 낳은 모든 선의의 결과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하며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경의 모호한 연설은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은 겸손한 지식인의 태도로 해석되어 청중에게 깊은 공명(共鳴)의 감동을 주었다. 같은 시각, 강 교수는 연구실에서 최신 학회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실 조교가 스마트폰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와서 강 교수에게 들이밀며, "교수님, 이 영상 한번 보시겠어요? 요즘 항간에서 엄청 화제가 되고 있는 분인데, 교수님과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
강 교수가 무심히 시선을 돌려 조교가 내미는 휴대폰을 응시하니, 영상에는 턱시도를 입은 이경이 연설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영상 아래에는 큼지막하게 [박사과정 포기 후 수의학도로서 봉사, '자랑스러운 수의학도상' 수상]이라는 얼토당토 아니한 자막이 떠 있었으므로, 강 교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이마 위로 추켜올렸다. 화면 속의 이경은 분명히 과거 자신이 차갑게 단언했던 바 있던 바로 그 제자, 이경이었다. 하지만 자막의 내용은 달랐다. [수의학도, 박사 과정 포기 후 유기견 보호소에서 봉사].
강 교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이경이 수의학과가 아닌, 자신의 전공분야인 공학박사 과정 대학원생이었음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강 교수가 조교에게 묻기를, "자네 말이야, 여기 이 영상에 등장하는 이경 군이 수의학도였다고?" 조교가 의아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거두며 대답하기를,
"네? 영상뿐만 아니라 신문의 지면 기사에도 그렇게 나오는데요. 교수님이 선배이시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
".........! "
강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즉시 검색창에 이경의 이름을 쳤고, 이내 언론에서 이경이 '수의학도의 꿈을 접고 유기견 봉사에 뛰어든 영웅'으로 미화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강 교수는 문득 5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논문 대신 파쇄된 하드디스크 조각을 내밀던 제자 이경. 그리고 자신이 내렸던 절대적인 선고. "개는 논문을 파각하지 않네! 중요한 명제는 최소한 삼중의 안전망으로 감싸는 것이....."
그가 진실이라고 단언했던 시스템의 논리는 이경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겼다. 하지만 이경은 자신의 원래의 고통 위에 '선의의 거짓'을 덧입혀 또 다른 거짓을 만들었고, 이 거짓은 세상이 원하는 감동적 진실이 되어 이경에게 명예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경이 만들어낸 '거짓말의 제곱근' 역설을 마주한 것이다. 자신이 말한 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추상(Abstract)과 세상이 말하는 진실이란 헌신적 희생으로 선을 행한 영웅이라는 추상이 어지럽게 중첩(重疊)되고 있었다.
강 교수는 영상을 끄고 조용히 창밖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경에게 지도했던 '학문의 절대적 진실'이, 세상의 광범위한 '선(善)을 위한 거짓' 앞에서 힘을 잃고 명멸(明滅)해가는 기묘한 역설에 직면했다. 창밖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몇몇 조무래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깔깔대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상황이 와전(訛傳)되면 파각된 연구 논문이 다른 생명을 구하게 될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며 고소(苦笑)하고 있었다. / 끝.
결과가 과정의 정당성을 뒤엎어버리는 파라독스와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반전(反轉)의 비밀은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다. 진실은 너무 예리(銳利)하여 함부로 접근하면 다칠 수 있고, 질량(質量)이 없기에 무한소(無限小)로 판단해도 무방하지만, 근(根)과 계수(係數)와의 관계는 선명히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