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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콩트 스핀오프 : 모멸(侮蔑)의 달인(達人)

by 하이경

잔혹 콩트의 내용(이전 스토리)


촉망받던 공과대학의 박사과정 대학원생 이경은 졸업을 앞두고 필생의 역작인 학위논문을 완성 직전에 둔다. 그러나 논문 제출 전날,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견인 마루(Marru)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며, 모든 자료가 담긴 외장 하드를 파괴한다. 이경은 지도교수인 강 교수에게 디스크의 파편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찾아가지만, 강 교수는 냉혹한 선고를 내린다.

"개는 논문을 파각(破却) 하지 않네!! 최소한 삼중의 안전망으로 감싸는 것이 학문을 업으로 삼은 자의 근본적인.... “

강 교수의 이 '절대적 진실'은 이경의 모든 고통과 변명을 사회적, 학문적으로 무효화하는 '종신형'과 흡사했다. 실망한 이경은 모든 꿈을 상실한 채 박사과정마저 중도 포기한다. 이 '실패'는 연구실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이경의 연구결과를 폄훼(貶毁)하고 시기하던 경쟁자 김 씨 등에게는 완벽한 승리의 구실이 되었다. 좌절한 이경은 도시를 떠나 이름 없는 동물 유기견 보호소에서 절망적인 삶을 시작하지만 ‘거짓말의 제곱근’ 논리를 발견하며, 동물보호소에서 인정을 받아 선한 행위로 항간에 이름을 전파하게 된다.


지난밤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잠을 설친 강 교수는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에 연구실로 출근하여 마침 수업이 없던 석사과정의 조교에게 심부름을 부탁하였다.


“자네 휴대폰 메시지로 주소를 찍어 보낼 테니,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이 USB를 지정한 수신인에게 전달하고 오시게나.”

“교수님! 이 메일로 전송하면 간단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 메일로 바로 전송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닐세! 보안관계상 메일로 전송할 수 없는 중요 사안이라서 그러네. 아참, 당사자에게 USB를 전달할 때 파일에 인크립션(Encryption)이 걸려있으니 복호화하려면 나에게 전화를 달라고 전해 줄 수 있겠는가?”


같은 시간, 이경은 동물 보호소에 새로 입사하게 된 외국인 근로자 파이자르(فیصل)에게 일상적 루틴의 OJT (On the Job Training)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60대의 노인으로 시리아 출신 난민이었다. 이경이 근무하는 동물 보호소는 예산의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받고, 일부는 독지가나 시민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이른바 비영리사회기업이었으므로 복지차원에서 취업이 마땅치 아니한 난민출신 외국인 노동자를 의무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막 점심식사를 끝내려 하던 차에 강 교수가 보낸 조교를 외부 손님으로 접견한 이경은 조교로부터 강 교수의 전언을 듣고 적지 아니한 충격을 받았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거나 하다못해 연락을 취하고 싶지도 않을 사람... 그런데, 전화 연락을 해달라고...? 일순 그사이 이경으로부터 사라진 줄로만 알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문득 기억으로부터 부활하여 복고(覆考)되고 있었다.

"개는 논문을 파각하지 않네!! “


강 교수의 아찔한 잔상(殘像)이 한 번 더 이경의 둔부를 강타(强打)하며 지나갔다. 조교는 이경에게 USB를 인계하고,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돌아갔다. 건네받은 USB를 바라보는 이경의 심정은 처연(凄然)하고 착잡해졌다. 내 근무지를 강 교수가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USB의 내용은 또 뭘까?


이경이 컴퓨터에 USB를 장착하고 내용을 열어보니 두 개의 파일이 있었는데, 하나는 UTF 포맷의 Read_me 텍스트 파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워드 프로세싱 파일이었으나 조교의 전언대로 암호화로 잠겨있는 파일이었다. 와중에 Read_me 파일을 열어본 이경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 진다는 표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이 영어로 쓰여 있었기에 해석을 하자면 대략 아래와 같았다.


<매스컴을 통하여 자네의 근황을... (중략)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질 못하고 자기 기망(自己欺妄) 속에 헛된 꿈으로 살고 있는 건가? 첨부된 논문을 보고 고견(顧見)을 피력(披瀝)하여...(중략) 부득이 사칭(詐稱) 및 사기혐의로... (이하생략)>


“그렇군! 박 교수는 매스컴을 비롯하여 SNS에 도배된 나의 영상들을 근거로 근황과 근무지를 추적할 수 있었겠군…….”


짐작 가능한 이경의 추론은 틀리지 않았기에, 연락을 달라는 강 교수의 전언을 무시한 것은 차마 그의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이경이 암호화로 잠긴 파일을 열어보려 에디터와 씨름을 하다 말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잡무를 보던 난민출신 늙은 근로자 파이자르(فیصل)가 이경에게 서툰 한국어로 더듬거리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런 암호화된 이진 원시파일은 상용 에디터로는 열리지 않아요....”

“........?”


전혀 의외의 상황에 당혹(當惑)해하던 이경이 파이자르에게 질문하기를, “미스터 파이자르! 암호화 프로그램에 대하여 잘 아시나요?” 하니, “지금은 비록 난민처지이지만, 이전 한때 독일 뮌헨공대(TUM)에서 컴퓨터공학 교수로 재직한 커리어가 있었지요. 어지간한 베츠위생렁(Verschlüsselung)은 풀어낼 수 있습니다.”라는 뜻밖의 놀라운 대답을 하였다.


“독일어인가요? 베츠 위.. 뭐요? 제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영어로...”


“영어로는 인크립션(Encryption)이라고 하지요... 암호화 방법입니다. 잠시 자리를 내주신다면 제가 시도해 볼 수 있어요.”


내심 놀랍고 또 신기해하며 이경이 파이자르에게 자리를 내준 지 십여 분만에 “매우 흥미로운 열역학 관련 논문이로군요...” 하면서 파이자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라며 말꼬리를 흐리고는 사료 배합실로 돌아갔다.


암호가 격파된 논문 초록과 본문을 훑어본 이경은 기가 막혔다. 그것은 이경이 박 교수에게 제출한 바 있었던 논문 초고와 흡사(恰似)하였고, 심지어 실험데이터 부재(不在)로 결론을 어정쩡하게 결실(缺失)한 내용마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양상(樣相)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완성하지 않으면 당국에 고발조치를 하겠다는 말인가...?”


강 교수의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던 이경은 또 생각에 잠겼다. 이 논문의 초고는 오래전 심의에서 탈락되어 퍼블리싱되지는 않았지만, 데이터베이스 아카이브에 이미 내 서명으로 저장되어 잠겨있다. 이 양반의 실질적 의도는 무엇인가?


실의에 침잠(沈潛)한 이경은 당직 근무 중이던 파이자르에게 솔직한 심정으로 그동안 있어왔던 경위(涇渭)를 비롯하여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고 대책(對策) 이라기보다는 선심(善心)의 조언을 구했다. 이경이 늙은 종업원이자 시리아출신 난민 파이자르에게 비밀이 아닌 그만의 고심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파이자르가 난민 자격으로 이 나라에 표류해 온 것에 무슨 사연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 이경은 파이자르의 고매(高禖)한 인격을 위시(爲始)하여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임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그는 최소 9개 국어에 능통하였고, 더구나 로망스어나 페르시아어 계통의 외국인에게는 어렵기로 소문이 자자한 한국어까지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구사하는 천재에 가까운 재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경의 전후사정을 듣고 난 파이자르는 이경에게 다음과 같은 섬뜩한 조언을 하였다.


“대체로 사람의 의도는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견주어 조류(潮流)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대방의 확실한 저의나 복선(伏線)을 파악할 수 없으니 잠시 이곳을 떠나 시간을 저축해 두는 것이 현명하리라 판단합니다. 상대가 어떤 앙심(怏心)을 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설혹 당신이 그가 원하는 대로 논문의 결실(缺失)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을 시킨다고 한들 그의 폭로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언제든 제삼자를 동원하여 사칭(詐稱) 및 사기혐의로 고발하여 시끄럽게 이슈화시킬 수 있으니 말이지요.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요. 그 논문의 결실부(缺失部)는 이론적으로 충당(充當)할 수 없는 치명적(致命的) 오류가 있습니다. 그건 선행 연구자들의 학위와 단단히 결속(結束)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준용한 박사학위 논문이 과연 몇 편이나 되는지 짐작이나 하시나요?”


파이자르의 조언을 경청한 이경은 낙담(落膽)하고 말았으나, 놀라우리만큼 해박한 그의 지식과 난감한 상황대처(狀況對處) 방식의 조밀(稠密)함은 실로 탄복(歎服)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자르의 조언대로 이경은 보호소를 떠나 잠시 종적을 감추기로 하고 소장을 만나서 사정을 밝히니 소장도 ‘나의 실수로 일어난 해프닝’이라며 그에게 자못 미안함과 서운함의 뜻을 전했다.

며칠 후, 보호소를 떠나는 이경에게 파이자르는 손수 마련한 듯한 황색파일 꾸러미를 내밀며 ‘아디오스 아미고(Adiós amigos)’라는 인사말과 함께 하얗게 웃어 보였다. 이윽고 도회지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이경은 파이자르가 내민 황색파일을 열어보니 영어로 쓴 손 편지와 알 수 없는 인쇄물이 있었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미스터 리, 내 생애에 친절하고 사려(思慮) 깊은 당신을 만나 행복했소. 노파심(老婆心)이지만 당신의 위선(僞善)에 대하여 그다지 우려하지 마시오. 당신에 비하면 내 삶은 철저한 가면(假面)의 연속이었소. 당신이 인지(認知)하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판이(判異)함을 안다면 좋겠소. 잘 모르기는 해도 내가 여기 이곳까지 떠밀려 흘러온 것은 아마 당신을 만나고 오라는 알라의 계시라고 판단됩니다. 여기 당신을 위한 선물을 인계하고, 나 역시 24시간 이내에 이 보호소를 떠날 겁니다. 이 편지와 증서를 지니고 취리히소재 성베드로 성당 맞은편에 있는 UBS 본사를 찾아가 총괄매니저에게 ‘이브라힘 하산 알 사마라’의 대리인이라고 말하면 당신에게 소소(小少)한 선물을 안겨줄 것이오. 미스터 리, 행운을 바랍니다.>


매듭!

To be continued in the next epis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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