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는 논문을 파각하지 않는다

사어(死語) 판 잔혹 콩트 : 제 기만(欺瞞)에 스스로 속다.

by 하이경

오후의 창연(蒼然)한 햇살이 강(姜) 교수의 연구실을 비집고 들어섰으나, 그 빛은 이경의 어깨 위에서 힘없이 꺾여 들어갔다. 사방을 압도하는 듯 길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마치 그 자신이 짊어진 좌절의 무게인 양 묵직하고 비장(秘藏)한 어둠을 전파(全破)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 밤의 무거운 고독을 짊어진 채, 제출 마감 시한이 훌쩍 넘은 시점 즉, 종말(終末)에 제출해야 할 논문 대신 검은 비닐봉지 하나만을 쥔 채 서 있었다.


“이경 군, 자네가 지금 나에게 논문이 아닌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자명(自明)하네.”


강 교수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의 차분한 동작은 오히려 이경의 혼미한 의식을 더욱 짓누르는 듯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저번 학기에 기 제출한 논문 초고가 훌륭했네만, 논문의 주제를 변경하겠다는 자네의 의견에 나 역시 십분 동조하였고, 더구나 격려까지 하지 않았던가? 또 이번 논문제출 기회가 자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을 익히 알고 있지 않는가?”


이경은 침묵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5년간 그의 삶의 유일한 위안처이자 고독의 동반자였던 늙은 반려견인 마루(Marru), 마루는 그의 논문 초고를 무릎에 베고 잠들었고, 새벽녘의 지독한 Key-in (컴퓨터 자판) 소리를 기꺼이 배경 삼아 숨 쉬던 그의 또 다른 페르소나(Persona)였다. 이경은 떨리는 손으로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쇄(破碎)된 외장 하드디스크의 잔해가 담겨 있었다.


“교수님… 용서하십시오. 어젯밤… 제 반려견 마루가 유명(遺命)을 달리했습니다. 수의사의 진단으로는 졸지(猝地)에 당한 심장마비였다고 했습니다.”


이경은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려 했으나, 흐느끼듯 뼈저린 고통이 그의 음성 속으로 토해져 새어 나왔다.


“마루가 이 세상을 등지는 그 찰나(刹那)에,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 하드디스크를 무참히 물어뜯었습니다. 장난감이라 여겼는지 혹은 저에 대한 서운함이었는지는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수행했던 연구 실험 데이터와 도표, 조사 자료를 정리한 문헌 등은 이 디스크 안에 있고, 심한 물리적 손상을 입은 상태라 복구 자체가 불가한 상황입니다.”


사건이 있던 당일 마지막 논문수정을 하려 외출에서 돌아온 이경은 정신줄을 놓고 마루의 임종(臨終)을 온전히 지켜보는 데 바쳤다. 마루가 떠난 후, 파괴된 하드디스크를 끌어안고 터져 나온 오열(嗚咽)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마루가 파괴한 것은 단순히 자료가 아니라, 낙망(落望)의 벼랑 끝에 선 자신에게 남겨진 무언의 호소였으며, 마지막 비상구였다는 것을.

강 교수는 파편(破片)들을 응시했다. 여전히 무감한 표정이었다. 그의 대답은 이경의 모든 비참한 현실을 일시에 얼려버릴 만큼 냉혹했다.


“이경 군, 학계에는 불문율(不文律)이 존재하네. 학위는 자네의 고난이나 연민(憐愍)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네. 이는 오직 연구의 증거와 노력의 결과로만 취(取)할 수 있는 그야말로 중추(重推)의 명예일세.”


강 교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경의 영혼을 예리한 칼로 관통하는듯한 최후의 선고를 내렸다.


개는 논문을 파각(破却) 하지 않네!! 그리고 설령 그리하였다 한들, 그것은 자네의 비루(鄙陋)한 변명일 뿐일세. 중요한 명제(命題)의 결실은 최소한 삼중의 안전망으로 감싸는 것이, 학문을 업(業)으로 삼은 자가 짊어져야 할 근본적인 책임일세!”


그 한 마디는, 이경의 개인적인 비극을 시스템의 무정(無情)한 논리 앞에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루의 죽음은 그의 삶이었으나, 저 강고(強固)한 학문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낡은 일화(逸話)에 지나지 않았다. 마루의 상실과 논문의 실패, 그리고 그 슬픔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야말로 이경이 감당해야 할 잔인한 업보였다.


이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조각난 외장 하드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반려견 마루의 공허함, 그리고 변명이 통하지 아니한 가차 없는 학위의 좌절이었다. 그날, 그는 논문만이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모든 염원(念願)을 그 차가운 연구소 행정실에 묻어버렸다.


이경은 끝내 피나는 노력을 쏟았던 박사 과정을 자의로 중도에 멈추었다. 그의 중도 포기는 주변인들에게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낳았으나, 그 누구도 그가 겪은 절실한 고통의 무게를 공감하거나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끝내 도시의 삭막함을 버리고, 한적한 교외의 작은 동물 보호소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상실된 반려견의 영혼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으나, 그의 돌봄이 필요한 유기견들을 보살피며 암묵의 참회(懺悔)와 더불어 다소의 위안을 얻었다.


밤이 되면, 이경은 보호소의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잡무(雜務)를 기록했다. 그는 여전히 하드디스크나 데이터 저장 매체를 접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경계심과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관리 보고서와 사소한 기록들을 습관처럼 클라우드와 USB에 두 번 이상 복사했다. 그것은 강 교수의 냉엄한 가르침이자, 그가 한때 학문 탐구의 문턱에 서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잔상이었다. 어느 날, 보고서 제출을 늦춘 한 동료가 난감한 표정으로 읍소(泣訴)했다.


“어제 시스템 오류인지 저의 실수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금일 오후까지 제출해야 할 기록 파일이 통째로 소멸(消滅)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순간, 이경의 귓가에는 강 교수의 차갑고 절대적인 목소리가 환청(幻聽)처럼 울려 퍼졌다.

“개는 논문을 파각(破却) 하지 않네!!”



동료의 변명은 일상적 실수에 불과했지만, 이경에게는 거대한 진실의 재현(再現)이었다. 세상은 개인의 불행이나 예기치 않은 우연을 결코 면죄부(免罪符)로 인정하지 않는다. 시스템 오류이건, 반려견의 비극적 죽음이건, 모든 것은 '결과'와 그에 대한 '책임'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의 반려견 마루가 먹은 것은 논문이었으나, 이경의 삶은 그 변명을 넘어설 수 없었던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에 의해 영원히 잠식당한 것이었다.


이경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에게 백업된 파일을 건네주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때 그의 꿈이자 소망이었던 학위와, 그 꿈과 소망을 한꺼번에 좌절시킨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삶의 가장 깊은 심연(深淵) 속에 간직한 채, '개는 논문을 먹지 않는다'는 차가운 현실이 새겨진 운명을 시지프스의 반복된 고통으로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 끝.


뭔지 으깨지는 현상을 지칭하는 대표적 의성어로 '빠각!'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의 기원이 사전 속에서 잠자는 사어(死語)인 파각(破却)이라는 단어로부터 유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가 논문을 먹었다는 건 궁색하고 초라한 변명이자 상상이지만, 누군지는 상상이 빚어낸 거짓말을 죽을 때까지 진실로 믿고 산다.나, 거짓말을 있게한 거짓말의 제곱근 값은 달리 해석될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끼와 당의정의 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