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稀代)의 명문(名文)을 회상하다.
게으른 농부이자, 마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식적인 룸펜이었고, 평소 흙 한 줌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았지만, 당신의 손톱만큼은 항시 정갈하게 다듬었던 양반. 안중근 친필의 모사본을 벽에 붙여두고 구들장을 거의 등에 지고 살았던 양반. 때때로 백상지를 방구석에 잔뜩 쌓아두고 조사와 접속사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한문 초서로 흘려 써가며, 앙리 베르그송과 하이데거, 헤겔의 논리와 근대 서양철학의 오류를 지적해 가며, 온종일 집필에만 몰두하던 진짜 조선시대 양반 같았던 양반. 그랬던 아버지는 종종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하여, 음악실의 피아노를 좀 쳐볼 수 있겠느냐고 뜬금없는 요청으로 담임선생님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의 관심은 마침내 나의 국어 교과서로 향했다. 그가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과 구학(漢學)에 두루 통달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다. 그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진지하게 숙독하더니만, 마침내 '초추(初秋)의 양광(陽光)' 이라는 서술(敍述)에 이르러 참지 못하고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요즘 학도들이 이토록 어수룩한 용어를 해독할 수 있을랑가? 번역이라 하여 한자어를 남발하는 얄팍함이라니, 차라리 ‘초가을의 정겨운 햇살’이라거나, 아니면 ‘따사로운 햇살’이라고 국문으로 풀어서 표현함이 마땅하거늘, 참으로 방정맞다...”
그 토하듯 내뱉던 혼잣말 속에는,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를 통과하며 체득한 지식인의 언어에 대한 고집과 순수성이 동시에 응축(凝縮)되어 있었다. 당대의 번역자가 지닌 어휘 선택의 서툰 표현이 그에겐 일종의 지적(知的)인 모욕 (侮辱)이었을 터이다.
세월을 더하여 이게 벌써 무려 50년 전 얘기이니... 현재의 나는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보다 20년 이상은 늙은 상황이다. 회상 커니와, 그때 나의 소년시절 만났던 희대(稀代)의 명문(名文)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이 애석(哀惜)할 따름이다. 태어날 때는 부모를 닮지만, 죽을 때는 자식을 닮는다는 서러운 전언(傳言)처럼, 교과서 본문의 해석은 한학(漢學)에 일가견(一家見)이 있던 아버지의 판단이자 고견(高見) 일뿐,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나로서는 고풍 (古風) 스러운 번역을 더 선호한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내게는 죽어버린 언어 (死語)가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50년 전 아버지의 언급처럼, 초추(初秋)의 양광(陽光) 을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로 순화 (純化)하여 번역된 '안톤 슈낙'의 명문을 아래에 소개하도록 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안톤 슈낙 (1892~1973)
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원문: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다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서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所行)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稚氣)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 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을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鐵柵) 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砲哮),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循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高官大爵),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한 시인(詩人)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고목이 섰던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車窓)에서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대,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이라 쓴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렸을 적의 나의 단짝 친구였지. 허구한 날을 도회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꺼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밭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을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은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 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 - 이 모든 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