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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비밀의 중심

잔혹 콩트 스핀오프: 취리히, 성 베드로 성당 맞은편

by 하이경

UBS 총괄매니저인 올리버 슈타이너에게 이경이 긴장된 목소리로 ‘이브라힘 하산 알 사마라’의 대리인이라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파이자르에게 받은 황색 파일을 내밀자, 올리버 슈타이너 매니저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이브라힘 하산 알 사마라’ 그 이름이 가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미스터 리, 귀하께서 여기에 도착하기 며칠 전, 알 사마라 님과 통화하여 당신의 방문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예상하고 있던 일정보다 훨씬 빨리 오셨군요. 그리고 이 '신탁 대리인 임명 증서(Certificate of Trustee Delegation)' 는… 완벽히 유효합니다."


슈타이너 매니저는 침착함을 되찾아 이경에게 말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손 편지 아래에 있던 인쇄물은 현금예탁증서나 일말(一抹)의 계좌가 아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나타난 슈타이너는 소형(小型) 은색 열쇠 하나를 이경의 앞에 밀어 놓으며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이것은 단순한 금고 열쇠가 아닙니다, 미스터 리. 알 사마라 님의 신탁은 현금이나 주식 포트폴리오를 넘어섭니다. 이 열쇠는 우리 본사 지하에 있는 '프라이빗 트러스트 볼트(Private Trust Vault)'에 대한 접근 권한을 상징합니다. 그 안에는 알 사마라 님께서 오랜 기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하셨던, 특정한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잠시 말을 끊고 이경의 눈을 응시했다. 이경의 얼굴에는 강 교수의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 온 난민처지와 같은 불안함 대신,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무게를 짊어진 대리인으로서 일순 당혹감이 일었다.


"신탁 문서에 의하면, 이 물건은 단순히 금전적 가치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알 사마라 님의 유산이자, 수십 년 동안 특정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움직임에 대한 핵심 정보와, 그에 따른 엄청난 규모의 비(非) 통화성 자산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원본 기록들입니다. 귀하의 역할은 이 기록들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신탁이 정한 조건과 시기에 따라 지정된 인물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경은 자신이 파이자르의 황색 파일에 담긴 것은 도피 여행에 소모할만한 얼마간의 생활비 수준 정도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저 낡은 옷차림의 동물 보호소 근로자로만 알았던 파이자르, 즉 이브라힘 하산 알 사마라가 실은 세계 금융과 권력의 중심부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을 맡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 파일에 있던 현금예탁증서는 단순한 위임장 역할이었던 거군요." 이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확합니다. 현금은 언제든 추적될 수 있지만, 이 열쇠와 '신탁 대리인 임명 증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경로입니다." 슈타이너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귀하를 안내하여 볼트로 이동하겠습니다. 미스터 리, 귀하의 임무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이경은 소형 은색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작고 차가웠지만, 손 안에서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졌다. 강 교수의 협박은 이제 작은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는 지금, 세계의 권력과 비밀이 얽힌 거대한 미스터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알 사마라 님은 귀하에게 두 가지를 남기셨습니다. 첫째는 이 신탁 계좌의 대리인 자격, 그리고 둘째는 이 열쇠입니다. 이 뱅크볼트(金庫)에는, 알 사마라 님께서 개인적으로 보관하시던 자료가 들어있습니다. 그분은 귀하가 누군지로부터 모종(某種)의 부당한 협박에 처해있다는 것과, 열역학적 엔트로피 법칙과 결속(結束)된 학위 논문들의 치명적인 오류를 당신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진실을 담아두셨다고 전해왔습니다."


올리버 슈타이너의 설명을 청취한 이경은 손에 쥔 은색 열쇠를 바라보며, 파이자르 노인이 자신을 여기 이곳까지 인도하게 된 어렴풋한 이유와 이제는 자신이 단순한 도망자가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파이자르는 이경을 개인적 다툼뿐만 아니라, 학계의 거대한 비밀이 엮여있는 전쟁터로 인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무기는 바로 이 취리히 은행 금고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경이 매니저 슈타이너에게 질의하기를, "미안하지만, 저는 파이자르 노인, 아니 '이브라힘 알 사마라'님을 잘 모릅니다. 그저 시리아 난민 출신으로 상당한 수준을 지닌 인상적인 지식인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습니다." 하며,이경이 슈타이너 조심스럽게 요청하니, 슈타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정리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건조했지만, 전달하는 정보의 무게는 엄청났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업계의 철칙(鐵則)상 개인의 신상정보 발설은 금기(禁忌) 사항이지만, 귀하께서 알 사마라 님에 관한 질의가 있거든 전해드리라는 그분의 전언이 있었기에 기재된 서류를 보고 소상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브라힘 알 사마라님의 정체는 시리아 출신 열역학 전공, 특히 단열 과정의 엔트로피 연구와 관련한 유럽 대륙 최고 권위자로서, 단열 과정 물질 상태 반응의 핵심 응용 기술을 지닌 인물입니다. 뮌헨 공대 컴퓨터 공학 교수 재직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로부터 납치를 당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모국인 시리아 정부로부터도 지하드 (جهاد)와 샤리아 (شَرِيعَة) 에 얽혀 지명 수배자로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약 10여 년 전에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요."

슈타이너는 설명을 마무리하며 말을 이어갔다.


"알 사마라 님이 우리 은행에 본인의 자산을 신탁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었고, 그분의 연구 결과와 지식을 이용하려는 거대 권력의 위험에 직면하여 피신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 저와 통화한 내용으로는 난민으로 위장하여 도피하던 도중 귀하를 만났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아 참, 그리고 귀하의 논문 초고와 흡사한 미완성 논문을 보고, 귀하와의 만남을 알라의 계시로 여겼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취리히의 UBS 본사. 올리버 슈타이너 매니저가 안내한 뱅크 볼트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견고한 공간이었다. 이경은 파이자르가 남긴 은색 열쇠를 떨리는 손으로 금고문에 꽂아 넣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순간,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금고문이 열렸는데, 그 안에는 금괴나 보석 대신, 세 개의 물건만이 놓여 있었다. 두툼하게 묶인 서류 뭉치. 작고 견고한 티타늄 외장 하드 드라이브와 그리고 낡은 중동식 가죽 표지의 수첩 한 권. 슈타이너는 엄숙하게 말했다.


"알 사마라 님의 전언과 서명된 위임에 따라, 이 모든 것은 이제 미스터 리 귀하의 소유입니다. 저희는 그 내용에 대하여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


이경은 서류 뭉치를 펼쳐 들었다. 가장 위에 놓인 논문 표지에는 익히 아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비가역적 열역학 시스템에서의 임계점 도달 연구: 제2법칙의 재해석에 관한 고찰>. 그러나 하단에는 자신의 이름 옆에, 이브라힘의 아랍어 서명이 함께 기재되어 있었고, 논문의 컨클루션(Conclusion) 마지막 장에는 타당한 실험 데이터 도표와 결론이 완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경이 미완성으로 남겼던 결론부의 핵심은 간결하면서도 폭발적이었다. 엔트로피 증가 속도가 특정 임계점 이하, 즉 0.003%에 도달하는 순간, 시스템은 외부에 열을 방출하지 않고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순환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미분방정식과 중적분으로, 그리고 실험데이터로 입증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무열(無熱:Zero-Heat) 기반의 무한 동력에 가까운 에너지 기술이 이론상으로 가능함을 의미했다.


두 번째로 집어 든 티타늄 외장 드라이브에는 이브라힘의 연구 기록과 함께, 그가 언급했던 ‘치명적 오류’에 관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이경은 드라이브를 꺼내 연구 기록을 보기 전 서브 파일을 열었다. 폴더 하나는 '기둥(The Pillars)'이라고 명명되어 있었으며, 그 속에는 지난 수십 년간 엔트로피 법칙 표준 모델을 정립했던 전 세계 유수 대학의 박사 학위 논문 수십 편의 전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논문들마다 빨간색으로 표기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브라힘이 직접 손으로 쓴 듯한 메모와 주석들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오류: 0.003%의 임계값에 도달했을 때 발생하는 '양자 결맞음 효과(Quantum Coherence Effect)'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데이터 수집 범위에서 배제함."


"오류: 불변열 비율 값과 폴리트로픽 지수가 동일할 경우, 열전달이 되지않는 단열팽창 과정이지만 엄밀하게는 폴리트로픽 과정으로 볼수 없으므로 이것은 명백한 오류임."


"오류: 사이클 폭발 시 단열변화의 지수변화 임계값 0.003%에 도달했을 때 팽창 폴리트로픽 지수(n = γ)는 비열비(k)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은 귀무가설을 위배하고 있음."


과학논문의 귀무가설(歸無假說:Null Hypothesis) 이란, 통계적 검정(檢定)에서 ‘차이가 없다’ 거나, 또는 ‘효과가 없다’는 등, 현재의 상태나 기존의 주장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음’을 나타내며, 연구자는 이를 기각(棄却)하기 위해 증거를 찾아내는 가설이다. 쉽게 말해, '원래 이렇다'라고 가정하고 시작하며, 연구를 통해 이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할 때 대립가설 (H1)을 설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p-값은 확률 값(Probability Value)으로 실험 데이터가 귀무가설 (H0)과 얼마나 양립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인데, 통상적 기준은 p <0.05 (유의 수준 α=0.05) 일 때 귀무가설을 기각하고, 연구가설인 대립가설(H1) 을 채택한다. p <0.05라는 의미는 ‘관찰 데이터가 실제로 귀무가설이 참일 때 나올 확률이 5% 미만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0.003%의 데이터 조작은 수많은 학위 논문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고, 이 학위들이 다시 전 세계 에너지 산업과 정책의 근간이 된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고 이경은 판단하였다. 이브라힘은 단지 엔트로피 법칙의 이론적 허점을 발견한 것뿐만이 아니라, 학계와 산업계가 이 허점을 뻔히 알고도 그들의 카르텔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과학논문에서 귀무가설을 기각할 만큼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것처럼 조작되거나 과장되었다는 것을 ‘p-값이 뻥튀기’ 되었다고 표현한다. 이는 연구자가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 분석, 보고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 결정을 내리는 행위로써 예를 들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고문(拷問)하거나, 특정 아웃라이어 (Outlier)를 제거하거나, 엉뚱한 분석 수법을 시도해 가장 낮은 p-값을 보고하는 등의 방식이 있다.


p-값을 뻥튀기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효과가 없거나 미미(微微) 한 결과를 낳으며, 이러한 거짓 결과는 다른 연구자가 재현성 연구를 통하여 동일한 실험을 반복했을 때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확률이 매우 낮으므로, 재현불가의 상황을 초래한다. 표준편차는 데이터가 평균값으로부터 얼마나 퍼져 있는지의 산포도 (散布度)를 현출(顯出)해내는 통계량인데, 표준편차가 크면 데이터가 넓게 퍼져 있다는 뜻이기에 측정치에 변동성(變動性)이 있음을 의미하고 편차가 작으면 데이터가 평균 주위에 밀집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험치의 효과(效果)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변동성이다. 따라서 표준편차 값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변동성 자체에 대한 보고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편차(SD)는 표본의 산포도이고, 오차 (SE=SD/n)는 표본 평균의 산포도인데, 이 두 값을 의도적으로 오도하거나 더 작은 값을 제시하여 실험결과를 실제보다 더 정밀해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표준편차가 작아지면 검정 통계량(t값, F값 등)이 커지고, 그 결과 p-값은 작아져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학계와 연구계는 이런 위기에 대응하여 지금은 p-값의 기준을 0.005 (0.5%) 이내로 강화하거나, p-값 대신 정량적 효과 크기와 신뢰성 구간(區間) 보고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데이터가 조작된 논문들이 허다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디스크에 실려있는 학위 논문들은 당연히 철회 (Retraction)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듭 수정 (Correction)되어 마치 불사조(不死鳥)처럼 부활하고 있다는 이브라힘의 코멘트가 적혀 있었고, 이것이 단순한 통계적 분석의 실수(誤謬)가 아니라 데이터 조작이라면, 연구 윤리를 위반하는 심각한 변조(變造)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의 메모를 보고, 이경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문서 파일을 닫았다.


매듭!

To be continued in the next epis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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