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사물의 종언(終焉) 인생과도 같은 것
인간의 삶이란 망각(忘却)과의 지루한 투쟁(鬪爭)이며, 때로 그 투쟁은 극히 사소한 사물(事物) 하나를 붙들고 벌어진다. 이를테면, 40여 년을 해로(偕老)한 아내의 서랍 속에 묵혀 있는 벙어리장갑(mittens) 한 켤레와 같은 것 말이다. 내일 모래 칠순을 목전에 둔 그는 이제 와서 그 알량한 벙어리장갑의 존재론적 의미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젊은 날 아니, 그의 삶 전체에서 철저히 배제(排除)된 익명(匿名)의 사물. 그것이 이제와서야 비로소 노년의 궤적(軌跡)을 거스르는 여진(餘震)과 같은 미세한 균열(龜裂)로 다가왔다.
그는 거실의 낡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내가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보석함에서 그것을 꺼내어 조심스레 매만지는 장면을 엿본 것이 이 모든 사유(思惟)의 시작이었다.
그 벙어리장갑은 고아(孤雅)한 연분홍빛이었다. 그것은 처녀 시절부터 늘 아내의 곁에 있었다고 그는 막연히 짐작했다. 하지만 수십 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 장갑은 한 번도 그녀의 손에 끼워지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박제(剝製)된 기억처럼, 혹은 누군가에게 바쳐지는 제물(祭物)처럼, 오직 서랍 깊숙한 곳에서만 그 존재를 유지했을 따름이었다.
그에게 그 장갑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내의 내밀한 세계를 상징하는 부동(不動)의 상징(象徵)이었으며, 그가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완전히 침범하거나 소유할 수 없었던 아내만의 고유한 영역(領域)이자 내밀(內密)이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그 장갑은 늘 '나와는 상관없는 물건'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얄팍하고 교활(狡猾)한 현실 인식인가. 아내의 모든 것이 자신과 무관할 수 없음에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장갑을 타자(他者)의 흔적으로 함부로 규정(規定)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노년의 사유(思惟)는 비단 세상의 이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퇴색한 젊음에 대한 처절한 집착이나, 혹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쓸쓸한 탐구로 변주된다. 그의 뇌리(腦裏) 한 곳을 점령(占領)한 의문은 단순했다. "도대체 저 장갑은 누구의 것인가?" 만약 그 장갑이 그녀의 어떤 남자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늙은 심장 속에서 수십 년 만에 시들어버린 질투(嫉妬)의 잔해(殘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질투는 젊은 날의 격정적 소유욕과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려는 학자의 고독한 호기심과 질투의 변주(變奏)가 섞인 집념과도 같았다.
아내에게 그 장갑이 미완(未完)의 연애나 영원히 봉인(封印)된 약속의 증표라면, 수십 년의 해로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는 자신이 아내의 삶 깊은 곳에 주요 서사를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단지 길고 지루한 주석(註釋)에 머물렀던 것은 아닌지 섬뜩한 의심을 품었다.
겨울, 첫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낡은 구들장 아래에서 올라오는 온기 속에서 그는 드디어 금기(禁忌)된 질문을 아내에게 던졌다. "여보. 그 벙어리장갑 말이야. 당신 서랍에 있는... 그거, 누가 준 것이오?"
그녀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침묵은 그에게 40년이라는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그 침묵 속에는 오래된 슬픔도, 달콤한 회상도,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을 향한 연민까지도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의 예상을 철저히 배반했다.
"누가 주긴요. 내가... 그냥 처음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어요."
그녀의 눈가에 맺힌 희미한 눈물은 그의 허탈감을 증폭시켰다. 그녀는 장갑의 내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다만 ‘갖고 싶었던 것’이라는 실로 투명치 아니한 모호(模糊)하고도 강렬한 소망의 언어만을 던져주었으며, 공허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어이 부재(不在)하였다.
그는 그 밤, 아내의 벙어리장갑에 얽힌 장대(張大)한 서사의 미스터리를 끝내 풀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그녀의 벙어리장갑은 내 모르는 특정 인물의 징표(徵標)가 아니라, 아내라는 존재의 본질을 은유하는 사물이었음을... '처음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 그것은 아내의 소녀 시절 꿈일 수도, 가질 수 없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일 수도, 혹은 그에게마저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던 그녀만의 고독일 수도 있었다. 반세기에 가까운 결혼 생활은 그에게 그녀의 몸과 시간은 주었으나,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그 장갑 한 켤레만큼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제 차라리 신비(神祕)롭기 까지 한 아내의 벙어리장갑에 대한 비밀을 다시 묻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는 아내가 행사하는 침묵(沈默)의 권리를 겸허히 수용하고, 아내의 서랍 속 작은 공간에 존재하는 그 불멸(不滅)의 연분홍색 사물을 존중하기로 했다. 새벽녘, 그는 잠든 아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따뜻하고, 나약하고,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새겨진 손.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아내의 손을 벙어리장갑처럼 완전히 감싸 쥐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아내의 가장 확실하고 가장 따뜻한 현실임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점유(占有)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상대가 간직하고자 하는 침묵까지도 존중하는 숭고한 포기임을. 그는 70세의 겨울이 되어서야 그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실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사물의 종언(終焉)이란, 왜곡(歪曲)되어 흘러가는 기억의 배반(背反)과 동질이며 우리 인생과도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