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이라는 사슬빤스(Suspense)
"친구는 가깝게, 적은 더 가깝게"
이 대사는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 콜레오네가 남긴 유명한 명대사로 원문은 "Keep your friends close, but your enemies closer"이다. 이 말은 단순히 적과 친하게 지내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냉혹하고 철저한 생존 전략을 담고 있다. 친구는 믿기 때문에 굳이 감시할 필요가 없지만, 적은 나를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위험 요소이기에 적을 내 곁에 두면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약점이 무엇인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상대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비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깊은 뜻이 있다. 무작정 적을 밀어내기만 하면 그들은 꼭꼭 숨어버리지만, 내 시야 안에 두면 그들의 행동반경을 내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내면 상대방도 칼을 갈겠지만, 오히려 가까이 두며 호의를 베풀면 상대는 방심하게 되니, 그 방심의 틈을 타서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을 가하라는 마피아식의 싸늘한 지혜가 담겨 있다.
요약하자면, "친구는 믿음으로 곁에 두지만, 적은 생존을 위해 감시의 눈길 아래 두라" 하는 내용으로 마이클 콜레오네가 아버지(비토 콜레오네)로부터 배운 가르침이라며 언급하는데, 실제로 비토와 마이클이 배신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이 딱 이 문장 그대로이다.
이 격언을 현실 정치에서 역동적으로 재현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트럼프일 것이다. 그는 어제의 적을 오늘의 부통령으로 만들었고, 적대국의 독재자와 ‘러브레터’를 주고받으며 적을 자신의 통제권 안에 묶어두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 전략적 유능함이 리더의 ‘도덕적 결함’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상인의 세계에서 도덕은 곧 ‘이익’과 ‘신용’이다. 이윤을 남기고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 상인의 최우선 가치다. 트럼프는 이 ‘상인의 문법’을 정치에 이식했다. 미국 정치의 오랜 관행인 로비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노골적인 ‘거래(Deal)’의 영역으로 변모시켰다. 지지자들은 이를 ‘위선을 벗어던진 실용주의’라 찬사 한다.
그러나 정치는 상업적 거래 이상의 영역이다. 상인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적과 손을 잡지만, 정치인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적을 대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도덕적 이해충돌’이라는 치명적인 균열이 발생한다. 트럼프식 리더십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공과 사의 경계가 희미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사업체를 유지한 채 국정을 운영하고, 가족을 요직에 앉히는 행위는 상인의 관점에서는 ‘패밀리의 결속’ 일지 모르나,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부패의 씨앗이다. 도덕적 결함은 단순히 ‘착하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사결정의 왜곡을 낳는다. 국익을 위한 선택이 아닌, ‘나의 비즈니스’나 ‘나의 영향력’을 위한 선택이 개입되는 순간, 리더십의 권위는 증발한다. 엔진 오일이 마른 기계가 마찰열로 인해 스스로 파괴되듯, 도덕성이 거세된 정치는 사회적 신뢰라는 윤활유를 잃고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다시 대부로 돌아가 보자. 콜레오네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적을 더 가깝게” 두어 조직을 지켜냈고, 비즈니스로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도덕적 선을 넘으며 형제와 가족의 신뢰를 모두 잃었다. 영화의 마지막, 낙엽이 굴러가는 정원에서 홀로 늙어가는 마이클의 모습은 도덕 없는 유능함이 도달하는 종착역이 어디인지를 싸늘하게 보여준다. 각설하고, 그대는 완벽할 수 없다. 적을 가까이 두어 정보를 장악하고 실리를 챙기는 전략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 전략을 실행하는 리더의 손이 사익 (私益)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그 대가는 오래갈 수 없다. 상인의 도덕으로 정치의 수박을 자르려 할 때, 남는 것은 찢긴 공동체의 신뢰뿐이다. 적을 더 가깝게 두는 전략가에게 묻거니와, “당신의 금고는 채워졌을지 몰라도, 당신이 지켜야 할 공존의 가치는 안녕하신가? 그리하여 과연 그대는 무결하고 완벽한 리더인가?”
도덕적 이해충돌을 해결하지 못한 유능함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밀물의 속도와 그 파도는 언제나 예상보다 빠르게 밀려온다. 고대와 현대사를 막론하고 국제 정치를 보자면, 마이클 콜레오네의 이 냉혹한 격언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적용된 사례가 많다.
트럼프에게 적은 영원한 적이 아니라 '언제이건 거래해야 할 상대'일 따름이다. 그는 중국을 강력히 비판하며 관세 다툼을 벌이면서도, 시진핑을 '매우 좋은 친구'라고 부르며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상대를 완전히 몰아내면 통제권을 잃지만, 긴장을 유지하며 가까이 두면 언제든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트럼프의 '적을 더 가깝게' 두는 전략이 실용적인 정치 기술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도덕적 이해충돌이라는 씁슬한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닌다. 특히 논란이 되는 이해충돌 지점들을 살펴보면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의 충돌 차원으로, 이는 가장 큰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보통의 정치인은 공직에 오를 때 자신의 재산을 '백지신탁'하여 운영에 관여하지 않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사업체 소유권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정부 관계자들이 트럼프 소유의 호텔에 머물며 거액을 지불하는 것이, 사실 간접적 뇌물이나 영향력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특정 국가에 유리한 정책을 펼칠 때, 그것이 국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나라에 있는 자신의 사업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정책적 불투명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상인의 세계에서 가장 큰 도덕은 '수익 창출'과 '계약 이행'이 될 것이다. 내가 돈을 벌고 내 회사를 키우는 것이 곧 주주와 직원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도덕적 행위'가 된다. 정치는 나를 지지하지 않는 반대파나 사회적 약자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상인의 자세로 정치를 하면 나에게 이익을 주는 쪽과만 거래한다는 이상한논리에 빠지게 된다. 상인의 거래는 흔히 내가 더 많이 가져오는 '제로섬 게임'인 경우가 많다. 상대의 약점을 잡고 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유능한 상인의 표상이다. 과연 그러한가...?
적과의 동침은 스릴과 사슬빤스(Suspense)가 차고 넘치는 상황일지는 모르되, 철학적으로는 언어도단의 허망한 짓이고, 인간적으로는 참 치사한 짓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