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굶는 자에게 실존은 있는가?

자본주의라는 엔진의 설계 결함

by 하이경

철학은 때로 지나치게 매끄럽다. 마찰계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철학에서 키르케고르의 뜨거운 절망부터 후설의 정교한 인식론까지,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자아는 마치 잘 짜인 기계장치처럼 명쾌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주 근본적이고도 거친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논의들이 굶고있는 자의 허기보다 얼마큼 중요한가?”

배부른 자들이 부르짖는 ‘절망’이라는 사치에는 중요한 설계인자(設計因子) 마찰계수가 누락되어 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그가 말한 절망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이들이 누리는 고급스러운 고뇌에 가깝다. 당장 오늘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이에게 “당신의 고통은 단독자가 되기 위한 신호”라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 통찰이 아니라 가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출중한 기만일 수 있다.

설계도가 아무리 완벽해도 현장의 마찰력과 중력을 계산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곧 무용지물이듯, 실존주의 철학 역시 인간의 물질적 토대를 생략한 뜬구름 잡는 관념의 유희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틀어 보자면 이는 관계의 단절이 부르는 비극으로 통한다. 실존주의자들은 타인과의 관계(緣起)를 끊어내고 홀로 서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관계를 ‘비본래적(非本來的)’이라 폄하했고,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앞에서 오직 혼자만의 결단(決斷)을 촉구했다. 하지만 인간은 며칠만 굶어도 깨닫게 된다. 나는 홀로 존재하는 단독자가 아니라, 누군가 만든 음식과 누군지 설계한 시스템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유기적(有機的)이자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사실을...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단절의 논리는 자칫 인간을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고립시키고, 굶주림이라는 현실적 재앙조차 개인이 감당해야 할 실존적 과제로 치부해 버릴 강력한 위험성이 있다. 이를테면, 그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자체를 물리적으로 부정하는 모순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은 모든 선입견을 괄호 안에 묶는 ‘판단 중지’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 괄호 속에 배고픔과 궁핍까지 포괄하여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인식의 순수성을 찾기 위해 현실의 고통을 소거하려는 시도는 공학적으로 정교한 알고리즘일지 모르나, 생명체로써는 불가능한 연산이다. 육체의 비명을 무시한 채 의식의 본질만을 탐구한다는 것은, 엔진의 마찰과 발열을 무시하고 토오크와 회전수만으로 출력(마력)을 계산하는 설계적 오류와 전혀 다를 바 없다.

키르케고르에서 후설로 이어지는 실존의 계보는 인간의 정신적 운영체제를 이해하는 데는 탁월한 지침서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 설계도가 현실에서 매끄럽게 구동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헐벗고 굶은 자의 무게’라는 변수가 입력되어야 한다. 진정한 실존은 관념 속의 고독이 아니라, 굶주림과 허무라는 현실의 마찰력을 견디며, 그 위에서 아주 조금씩 이나마 나만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투쟁이 아닌가? 시스템 밖으로 걸어 나가는 단독자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발이 딛고 있는 진흙탕의 의미와 온도차를 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논리와 현실이 상충하지 아니한 진정한 실존의 지점이 아닐까?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은 안락한 서재의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키르케고르가 외친 ‘죽음에 이르는 병’이나 후설의 ‘인식의 본질’은 현대인의 가벼운 불안을 달래주는 심리 처방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서늘한 진실이 있다. 실존주의는 원래 전장의 비명 속에서 태어난 철학이라는 역사적 분명한 사실이다.

공학적으로 볼 때, 거대 시스템은 생존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고 폐기물을 배출해야 한다. 무한 팽창을 생존 조건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 전쟁은 시스템의 과부하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연소 공정이다. 특히 중동은 이 거대한 기계장치가 굴러가기 위한 '영구적 연소실' 역할을 강요받아 왔다. 자본의 논리는 에너지를 확보하고 무기 재고를 소모하기 위해 중동의 전장을 유지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인간의 실존은 부품의 마모만큼이나 무가치한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만다. 즉,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엔진의 연료는 전쟁이라는 점으로,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시스템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시작된 실존주의가, 어느덧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실존주의자들은 중동에서 들려오는 폭격 소리를 '내면의 불안'이라는 관념적 용어로 치환해 버렸고, 그들은 자본주의가 전쟁을 필요로 한다는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는 대신, 시스템이 허락한 울타리 안에서 '자아'를 찾는 유희에 빠졌다.

전쟁을 먹고사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설계구조를 비판해야 할 설계자들이, 엔진이 불타는 동안 제어판의 인터페이스 디자인만 논하고 있는 꼴이다. 이는 철학자들의 직무 유기이자, 시스템의 꼬락서니가 보기싫어 눈을 감고 있는 맹목적 실존이 아닌가? 내가 누리는 풍요와 전쟁의 비극이 별개라고 생각한다? 단절된 개인이라는 개념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무지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우리가 누리는 자본주의적 안정은 세계의 전장에서 흘린 피와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다. 이 연결고리를 보지 못한 채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고 외치는 실존이란 더할 나위 없는 기만이다. 나의 실존이 타자의 파괴를 담보로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실존이 아니라 시스템에 포섭된 '기능'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련된 관념의 실존주의가 아니다. 중동의 전장과 나의 일상을 잇는 피의 파이프라인을 직시하는 차갑고 날카로운 실존이다. 실존이란 내면의 평화를 찾는 기술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장치가 인간을 어떻게 연료로 쓰고 있는지를 폭로하고, 그 기계적 필연성에 균열을 내는 투쟁이어야 한다. 전쟁을 잊은 철학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진짜 실존'을 말하려 한다면, 괄호 속에 묶어두었던 저 먼 곳의 비명부터 다시 그 설계도 내부로 가져와야 할 것이다.


실질적 대안으로서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주의라는 역사적·경제적 토대와 조우함은 어떤가? 사르트르는 초기에 개인의 절대 자유를 외쳤지만, 전쟁과 자본의 폭력을 목격하며 변화했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구속된 상황' 속에서의 자유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나를 굶주리게 하고 전쟁터로 내모는 이 자본주의 구조는 무엇인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별적 실존을 사회 구조(시스템) 안으로 가져온 적극적인 시도로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 실존이나 레비나스의 윤리적 실존은 어떤가? 실존주의가 '나'라는 감옥에 갇혀 전쟁을 잊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철학의 중심에 세웠다. '나는 생각한다?' 이것보다 앞서는 것은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처참히 굶어 죽어가는 타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실존은 그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정의되기에 '연기(緣起)의 관계가 없다'는 맹점을 '책임'이라는 고리로 연결한다. 인간의 실존은 지구의 거대한 생태계 시스템 일부임을 자인하자는 것이다. 자본의 무한 동력에 브레이크를 걸어야하고, '소유'가 아닌 '존재'와 공존을 실존의 가치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논리적 정합성에 죽고 사는 엔지니어의 시점과 실존주의 무게로 조망한 단상을 정리하고 보니, 참 더럽게 마음에 안 드는 잡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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