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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Feb 09. 2022

명품의 속성에 대하여

나타내 보이지 아니할 공명(共鳴)의 자유의지

  오래전 일이지만, 수시 채용에 따른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모집요강은 이공계열 기계공학 전공자로 제한하였음에도 경쟁은 치열했고, 최종 면접은 여성엔지니어 1인과 남성 엔지니어 2인으로 축약되었다.  

  그동안 숫한 인터뷰를 진행하여 왔지만 그날의 리쿠르팅 인터뷰는 기억이 선명한 이유가 있다. 한정된 인적자원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기도 하였지만, 모종의 아찔한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 채용일 망정 경력직이 아닌 다음에야 신입직은 직무교육인 OJT(on the job tranining)를 감안하여 채용을 하는지라 그날의 면접 포인트는 고독한 직무수행에 따른 끈기나 남다른 지구력을 지녔는지 여부가 인터뷰의 관건이었다. 하필 오후 내내 처리해야 할 다급한 사안과 퇴근 이후 사적인 일정에 정신이 팔려 인터뷰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내가 마지막 면접자에게 건성으로 질의를 시작하였다.


  "두 가지의 질문을 드릴 테니 동시에 답변을 하셔야 합니다. 채용이 된다면 우리 회사에 몇 년을 근무할 수 있으며, 옆에 둔 소지품을 구입한 이유에 대하여 답변을 해주세요."

  "........?"


  평범 무쌍한 외모와 화장끼가 없는 얼굴의 여성 지원자인 그녀는(지금 간파해 보자면 티 나지 않은 엷은 화장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느 면접자가 다 그렇듯 깔끔한 일상복 차림새에 도통 걸맞지 아니한 시중의 명품 브랜드로 알려진 로고의 소지품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성의하고 시큰둥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잠시 쭈뼛거리던 그녀가 이렇게 답변을 하였다.


  "비록 제가 지금은 백수신세지만, 그렇다고 당장 직업을 구걸하는 처지는 아니라서 올바르게 답변을 드립니다. 제가 채용에 합격한다 해도 언제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자신 없는 거짓말로 저를 속일 수 없으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 소지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품 중의 하나입니다."


  압박면접이었지만 서슴없이 당돌하고 깔끔하다! 내 무성의한 질의에 예상치 못한 뜻밖의 답변으로 응수한 그녀에게 나는 카운터 펀치 한방을 대차게 먹은 느낌이었다. 구직자인 '을'에게 면접자의 위치에서 '갑'질 하지 말라는 경고 같기만 한 그녀의 명쾌한 답변으로 일순 뻘쭘해진 나와는 달리 그녀의 낯빛은 변함이 없었다. 저 나이에 나는 저토록 당당한 적이 있었는가? 순간 나는 새삼스레 나의 청년시절을 회고하여 반추해 보고 나를 의심해 보던 찰나였다.

  이후 별 중요하지 않은 통상의 질의와 답변이 몇 번쯤 오고 갔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채점표를 정리하여 인사부서 팀장에게 릴레이를 하고 나는 서둘러 다른 업무를 진행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후 이름표를 차고 바삐 복도를 지나는 그녀와 다시 마주쳤는데, 여전히 씩씩한 생얼의 환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

  "오랜만이오, 직무교육이 끝나고 부서로 발령을 받으면 내가 대포 한잔 사도록 하지요. 면접 시에 무례한 질문에 대한 사과도 할 겸..."

  "아닙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 이렇게 합격하여 백수신세를 면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함께 일을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럼 또 봅시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그녀의 외양은 팜므파탈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요목조목 뜯어보면 그다지 예쁜 축에 들지 아니한 흔한 선남선녀의 평범한 마스크를 지녔다. 다만 씩씩하고 당당하며 중성적이고 건전한 건강미를 지니고 있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한 일 년 여쯤 지난 어느 날 퇴근 무렵, 웬 화사한 미녀가 바삐 지나치며 목례를 하기에 다시 쳐다보니 그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여쁜 자태로 변신해 있었다. 아하, 여자가 화장을 하면 저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를 신기해하며 평소와 썩 다른 화사한 그녀의 화장 이유가 은근히 궁금했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고 회식자리의 사석에서, 갑자기 미녀로 변신했던 날의 이유가 남자 친구 때문이었느냐며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에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고 믿고 있는 아빠와 데이트하는 날이었거든요. 한 달에 한 번쯤은 메이크업을 하는 날입니다. 모름지기 여자는 예쁘게 꾸며야 한다며 항시 잔소리를 하시거든요... 아빠의 바람에 딸로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샘입니다. 호호..."

  따지고 보면, 명품이란 검측이나 견적 산출이 불가능한 공산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명품이 있기 마련이다. 겉보기 비중으로 판단 불가한 고매한 성품을 지닌 순수함에 기인한 그런 사람 말이다.

  "음... 명품이 따로 없군! 내 생각에 자네는 말이지 명품 위의 명품이로군. 아하하...!"

내가 만나본 파리지앵중 흔해빠진 명품 브랜드를 지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형편없는 빈민이었을까?  

  잘생기고 예쁜 것도 타고난 자산인 까닭에 외모가 출중하면 상대방이 우호적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우호적 확률'이 높다는 입체적 의미에는 비논리적이고 함량 미달인 정체불명의 부실한 재료가 탄탄한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이 현상은 사고(思考)의 일반화에 따른 착오이다.

  일견, 생김새의 출중함이라는 막강한 프레임에 갇혀 본질을 오도하는 경향이 없지 않고, 남녀를 불문하고 훤칠한 생김새나 출중한 외모로 하여금 정작 그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가 다반사임은 불편한 진실에 가깝다. 흔한 판단의 오류는 지극히 사람이고, 사람이니, 곧 사람이라서 그렇다.

  이런 현상을 빗대어 조롱하는 말로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농담 같은 헛소리가 다반사인 것은 다소 웃길 망정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외양이 개인의 역량에 직결되지 않는 분야나 직종에서 외모를 역량의 구성 요소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냐고 비꼬듯 말하지만, 더러는 다홍치마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고, 핏빛 선홍색 다홍치마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부류도 있기 마련이다. 이는 시중에 널려있는 흔한 명품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소위 현대의 명품으로 취급되는 브랜드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주장하던 칼 막스 이전의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희한한 존재다. 상품의 가치란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이 만들어내고, 가치의 크기는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결정한다는 이른바 노동가치설을 완벽히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추 커니와 봉건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그 배경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당시 왕실의 귀족에게만 납품이 되던 이름난 장인의 수제품을 신흥계급으로 등장한 천민들이 귀족에게 사용료(로열티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시작한다.)를 지불하고 귀족의 물건을 구입하여 신분세탁의 도구로 삼거나, 부유한 귀족 흉내를 내는 수단으로 삼았던 역사적 근거가 있다. 즉, 당시에 하층민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던 신흥계급 중산층(내지는 브르주아나 졸부계급)들이 탄생시킨, 이른바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역사적 산물은 아닌지 사뭇 의심스럽다.


  사치의 차원을 벗어나 진정한 명품이란 견적이 불가능한 물건이자, 사용가치를 능가하는 골동품처럼 값으로 견줄 수 없는 고귀한 물건을 일컫는다. 그러나 필요불가결의 생필품이 아니기에 전적으로 사치성이 농후한 기호품이라는 측면에서 실용성으로 평가하자면 그저 존재가치를 지닌 단순 점유물과 진배없고, 한정된 극소량의 공급이라는 달착지근한 당의정을 입혀 특정 다수의 눈탱이를 치고 있는 대량생산품에 불과하다.

  명품을 허영이나 사치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이들은 그 물건의 이용(활용) 가치를 고려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물론 지불가능 금액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상징적 의미를 선호하는 극소수의 계층을 제외하면 "비싸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정서적 허기를 벌충하려 괴이 보상심리와, 저급한 럭셔리티 추구에 따른 정체불명의 구매욕으로 인한 획득 충동에 저항할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부유함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부자는 명품을 소유하지 않고 소비할 따름이다. 더구나 대부분은 진품보다 가품인 짝퉁을 선호하는데, 설마 하니 그들이 짝퉁을 지녔을 리 없다며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있다는 것과 있어 보인다는 의미가 그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우습게도 부익부란 이토록 뻔하고 하찮은 공식으로도 대차게 성립한다.

   시중에 흔해빠진 명품 브랜드와 그 아류의 디자인을 분석해 보면 기실 형편없다. 그들 나름의 거룩한 설계 철학은 유행을 배제한 고풍스러움과 중후함을 표방한다고 하지만, 이 슬로건의 다른 뜻은 한물간 촌스러움과 장중한 투박함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극소량의 품만을 공급하노라는 프로파간다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고, 눈치채기 힘든 고도의 마케팅 수법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족보를 지닌 허명의 잉여품에 불과하다. 더구나 리세일링을 차단한다는 그럴싸한 정책과 고가품이라는 인식의 위장 수단으로 팔다가 남은 재고 물량은 과감히 소각처리도 불사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 아니지만 사견으로는 전적으로 자원 낭비이자 지구촌 자연보호 정책의 위반이다.


  젊은 시절, 살롱에서 목소리를 팔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코코 샤넬이 생계수단으로 설계한 깃털 달린 모자나, 당시 파격적이던 깡똥한 스타일의 원피스 따위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시중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코코 샤넬 그녀 자신마저 다섯 번째 실패작이라며 대충 이름을 지어 팔아온 넘버 5의 향수내음을 풍기며, 피아제 시계와 조르쥬 루이뷔통을 걸치고, 살바토레 페라가모를 신었다 하여  어느 누구도 부유한 귀족 취급을 해주는 쓸개 빠진 사람은 없다. 복잡한 내면의 저렴함은 감추려 해도 본시 티가 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구찌에 구찌를 차고 신었거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온몸에 떡칠을 한들 천박한 신분을 커버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도 예외가 될리는 만무하다. (대부분의 사기꾼들은 알려진 브랜드로 떡칠을 하기 마련인데 종종 이런 사기빨에 넘어가는 부류도 적지 않음이 사실이다.)

  시니컬한 나이런 견해에 대하여 '당신의 헤픈 독설은 높이뛰기에 실패한 여우의 신포도가 아니냐'며 쓴웃음의 독백으로 힘겹게 항거할 뿐, 흔해빠진 브랜드의 보잘것없는 로고로 채워진 헛배의 포만감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공복의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중의 명품이란, 등록된 상표에 불과할 뿐 고도의 제조방식을 지녔거나 기술적인 차원의 독점적 권리로 보호받고 있는 발명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도 아닐뿐더러, 통상의 의미가 제한되어 항간에 회자되는 일종의 대명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컴퓨터의 입력장치인 마우스를 정말 쥐새끼로 오인하고 있는 얼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비록 하나마나 한 잡설과 무극(無極)의 독설일 망정, 저마다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사유에 관한 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해석 또한 자유다. 따라서 독자는 자가 제시하거나 유도하고 있는 텍스트의 맥락을 파괴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산문을 끄적이는 필자의 견해에 사족을 붙이자면, 적어도 필자 명품으로 취급되는 제품을 제조하거나, 또는 그것들을 유통하는 선량한 업체와 원한이 없고, 또한 그들의 고유한 장사수법을 비난 커나, 영업방침에 훼방을 놓으려는 불순한 의도 역시 전혀 없음 진중하게 밝히고 싶다.

  다만, 있어 보이고 싶지 아니할 자유와 나타내서 예뻐 보이고 싶지 아니할 자유의지에 대하여 구구절절 죄다 옳거나 보편적 가치를 지닌 반듯한 헛소리만 쓰고 싶지 아니할 자명한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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