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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an 29. 2022

그림자 놀이의 소묘

죽음이라는 실루엣에 관하여

  아버지는 중절모를 아끼셨다. 그 모자는 챙이 좁은 패도라(Fedora) 스타일이 아닌 성큼하고 묵직한 파나마(Panama) 스타일의 중절모였는데, 벗어두면 먼지라도 앉을까 싶어 종이로 모자 집을 만들어 방안의 모서리에 걸어두고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한 모자를 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좀처럼 외출을 하시는 일이 드물었지만 어쩌다 먼 동네의 잔치에 참석이라도 하는 날이면 중절모를 쓰셨다. 내가 기억하기에 집안의 대소사에는 반드시 중절모를 챙겼지만,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내는 이웃의 대소사에 참여할 경우라면 중절모를 생략하곤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고샅길 먼발치에서 중절모를 쓴 아버지를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과 환담을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자면, 혹여 아들을 위하여 뭔지 모를 청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고, 그 어렸던 당시에도 비하감으로 절망인지 원망인지 모를 자책을 하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2원 1차 연립 방정식의 쉬운 해법이나 삼각함수 따위를 알기 쉽게 일러주셨지만, 그 당시에 한참 야했던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을 읽고 있을 무렵 소설책을 빼앗아 마당에 패대기치며 일갈하시기를...

"어떤 무식한 선생 놈이 중학생에게 펄벅 여사의 대지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단 말이냐! 그 자식을 내일 만나서 한번 따져봐야 되겠다!" 라며 악을 쓰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중절모는 화재로 불에 타서 지금은 흔적마저 없지만, 나는 살아오며 내내 그 중절모를 기억하곤 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사망은 개인의 일상에서 사라진다고 믿지만, 망자의 생애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생존하는 후예들의 기억 속에 각으로 대차게  박혀 깊숙한 기억 어디쯤에 기생하고 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중절모를 써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나 역시 지긋지긋한 내  아버지의 생애처럼 그러한 전철로 흘러가야 하는지 어쩐 지의 생경한 미래가 암울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울 것도 없다. 종종 나는 나의 유서를 수정할 때면 회한보다 기쁨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 나는 너희들이 내 곁에 있어준 사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살아있는 순간 내내 행복하였다. 내가 호흡을 멈추게 되면, 영암 선산의 돌무덤에 갇히기 싫으니 그냥 화장한 내 흔적들숲의 골바람에 흘려보내거나 바닷가 어디쯤 언덕 위에서 바람에 날려 다오..." 뭐 어쩌고 구구절절 문구를 수정하다 보면, 짐작 가능한 나의 욕심과 지상에서의 행복한 순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아버지의 엉성하고 뻘쭘하던 그 중절모에 관한 기억에서 비롯된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아버지의 중절모를 기억하고 있듯, 내 아들과 딸이 나의 어떤 것을 기억해 줄 수 있을지를 빤히 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 마냥 내 주변의 누군지에게 각인된 생전의 기억이란 보통의 일상에서는 도통 그 의미가 뿌옇게 흐려 있으므로 쉽게 드러나지 않아 눈치채기 어려운 법이다.

일러스트 출처 : 오승우미술관 ‘노탄아트 그림자놀이’

  삶을 진지하게 사랑하려거든 때로 죽음을 인식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시작은 생존을 경유하여 마침에 이르기 때문이다. 원점이 애매하면 끝은 의당 허술해지기 마련이고, 곡선이건 직선이건 선은 점의 집합이기에 점으로 시작하여 점으로 끝을 맺는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지구인 들은 뚜렷한 시한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진지하게 망각하려 한다. 더구나 스스로는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착각으로 느닷없이 죽음이라는 화두를 꺼내면 참 재수 없다고 여기는 금기사항이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분명한 팩트인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여 애써 망각이라는 진통제가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무릇 인간이 제 아무리 현명하다 한들 착각이나 망각을 항시 곁에 두지 않으면 불안하다. 애증의 괴리가 분명하다.

  내가 당신을 보거나 당신이 나를 볼 수 있다면, 그건 실시간이 아닌 엄연한 착각이다. 태양이 발산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8분이 걸리므로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상대방과 과거의 빛으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광속이 299,792,458 m/s 이므로 당신과 나의 물리적 거리를 1m로 가정하여 정확하게 시간을 환산하면, 3.335x10^-9 초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계측의 관점과 직관적 신념이란 이토록 심각한 오차범위를 지니므로 대개의 확정된 사실은 종종 거짓으로 판별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어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 내 모르는 누군지 아직도 나를 염려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은 비록 내가 죽음에 근접해 있다한들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마침이란 다른 시작의 잠시 멈춤이라는 명목으로 발행된 의문투성암묵적인 고지서이기 때문이다.

  공학적 근거가 없기에 삶과 죽음을 한 묶음으로 취급할 수 없지만, 범우주적 현상으로 계량하자면 이 둘은 동등가의 중량비를 지닌 동전의 양면과 그 속성이 다르지 않다는 판단이다. 혹여, 이 견해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검측이 불가능한 생각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견주어 비교할 수 없고, 원래 없는 것을 필시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인간의 설계 결함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어제 죽었는데... 오늘 이렇게 뭔지를 또 끄적이고 있다. 불가사의한 점의 현상이거나 부활이 틀림없다.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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