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귀납이다

by 민예

출생은 어머니 뱃속이라는 완결된 세계와의 분리다. 모체로부터 독립한 인간은 처음 보는 거대한 세계와 맞닥뜨린다. 불가해한 것들의 천지에서 살아내기 위해 규범이 필요하다. 규범은 무정형의 존재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한다. ‘…이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은 ‘…이다’는 존재의 차원을 구속하고 사유와 행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법, 종교, 관습, 도덕 등 외부 요인의 일방적 수용을 규범으로 인정하면, 개인의 주체성이 설 자리가 없다. 사람은 단순히 종을 지칭하는 동물과 달리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살아냄은 무수한 역동성의 이어짐이다. 그래서 삶은 귀납이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내 몸이 경험하는 것이고, 파편적인 경험의 축적과 조립으로 세계를 구조화하는 원칙을 도출한다. 그래서 되돌아봄은 삶의 근원지다.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후회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과거는 직시해야 한다. 경험은 단지 그것을 했다는 행위가 아니다. 그 행위를 다시, 돌아서, 보아야만 귀납에 바탕이 되는 경험이 구성된다.


귀납적 추론으로 도출된 규범은 잠정적이다. 결론을 반증하는 새로운 경험이 틈입하면 규범력을 상실한다. 그러한 경험을 ‘사건’이라고 부른다. 함돈균은 ‘사건’을 사건 이후 그 사건이 잉태하는 연속적인 계열들이 맞물리면서 시간 지평 전체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사건은 삶의 충격이자 균열이자 활기이자 동력이다. 사건이 없으면 이미 존재했던 것에 발이 묶인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현재도 그래야 하고 미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과거는 반박 불가능한 대전제로 군림해 현재와 미래를 연역한다. 사건 없는 삶은 죽어있다. 사건은 삶, 즉 귀납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심장이다. 하지만 사람은 안정을 좇는다. 사건은 인식 지반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진동을 동반한다. 위태롭고 불안하다. 때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외면하기도 한다. ‘까마귀는 검다’는 믿음을 신봉해 흰 까마귀가 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한다. 주변적인 시각이 소실된 터널비전이다. 신념은 시야를 규정한다. 시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 신념이 정답이 아닐 수 있고, 언제든 폐기되고 수정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사건과의 만남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경험의 동질화다. 본래 귀납은 개별적이다.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경험의 조각은 천차만별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경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형식상 동일하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자유는 내용상 자유롭다. 나는 내 의지대로 살아낸다. 삶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것이다. 정해진 틀이나 수렴하는 방향이 없다. 자유는 무정형의 백지상태로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온전히 내 선택에 달렸다. 선택은 그에 걸맞은 책임을 수반한다. 어릴 적부터 선택하는 연습을 하지 못하면, 나중에도 나 대신 누군가가 선택해주기를 바란다. 구성원 대다수가 자율성을 위탁하는 사회는 에너지가 없다. 이정표가 세워진 길에만 사람들이 미어터진다. 그 길 외의 공간은 텅텅 비어있다. 똑같이 선택하고, 똑같이 경험하고, 똑같이 걸어가는 필연의 논리가 지배한다. 우연적인 사건은 일탈이자 비행이자 뒤처짐이다. 획일화된 방향은 속도를 부추긴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회는 방향에 주안점을 두므로 속도의 우열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목적지만을 바라본다면 속도가 유일한 가치다. ‘빨리빨리’가 중요한 경쟁사회에서 우연은 쓸모를 지시하지 않는다.


동질화된 경험은 공장식 귀납적 결론을 양산한다. 이는 상식이라는 거대하지만 모호한 실체를 지탱한다. 한국은 참으로 상식적인 사회다. 고도의 경제성장과 공교육 발달로 현재 성인의 절반은 대학 졸업자다. 하지만 대졸자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 수는 그보다 훨씬 적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학생은 공부-대학-취업이라는 상식을 선회하지 못한다. 사회의 어른도 대안을 모르는데 학생이라고 알 턱이 없다. 모두가 통과할 수 없는 좁디좁은 길임이 뻔히 보이는데도 유일하게 이정표가 있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뒤엉킨 공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잔인하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데, 당장 내 미래가 불투명한데 무엇을 따지겠나. 쓸데없는 회의와 자조를 지우고자 속도에 몰입한다.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며 주변 풍경을 지운다. “오십 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 도로 위에서 죽어. 저 사람들 좀 봐.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을 사리는 바로 그들이야.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거지?” 밀란 쿤데라 [느림]의 한 구절. 오늘도 어디서 또 다른 성수대교가 붕괴했다는 비보가 들리는 것 같다.


학교는 인성교육을 전면에 내세우며 학생에게 도덕을 가르쳐왔다. 인성교육이 교육적 의미가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덕분에 보편적 기본권에 대한 인식은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상식은 텍스트지, 현실태가 아니다. 이 중요한 논리는 때때로 간과된다. 사람들이 별다른 의문 없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상식을 현실로 착각하는 오류다. 헌법 제1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위 조항은 ‘평등한 상태다. 차별받지 아니한 상태다’라는 현실태 진술이 아니다. 그런 상태를 지향한다는 이념의 차원이다. 평등이념이 현실태에 반영되고 있는지는 다른 측면에서 따져봐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시위는 이슈다. 이슈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진부해져 효력을 다한다. 사람들은 이슈를 소비할 뿐, 직시하지 않는다. 내 세계를 균열 낼 사건으로서 다가옴을 두려워한다. 상식 뒤에 숨어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재생한다. 나는 사건을 보지 못했고, 이 안전한 세계는 몹시도 평등하다고 자신을 속인다. 혹여나 다음에 그런 사건을 보면 그때 나서겠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자아의 독립의식은 의식일 뿐이다. 지연된 실천은 실천이 아니다. 상식이라고 부르는, 한 개인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귀납의 약동을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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