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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노래 Aug 11. 2021

호수공원에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지닌 마법이 있다. 보고픈 가족과 따뜻한 식사, 그리고 유년 시절의 추억까지. 현대인들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과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 각자만의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평생을 같은 도시, 같은 동네에서 살아온 나 역시 집을 떠올릴 때면 으레 기나긴 밤을 수놓을 만큼 많은 기억들이 반짝인다. 그중에서도 고향에 얽힌 나의 추억은 호수공원의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어렸을 때는 가족과,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와도 함께 오는 곳. 하지만 역시 호수공원은 홀로 그 적막함을 곱씹으며 걸을 때 가장 매력적이다. 그래서 고향과 나라는 사람이 교차하는 지점 어딘가에서 항상 호수공원이 있다.

호수공원의 단편


호수공원은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로, 여름엔 우거진 녹색빛의 수풀로. 가을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들 어느덧 선선해진 가을 하늘이, 그리고 겨울에는 소복이 쌓인 함박눈이 나를 반긴다. 사시사철, 아니 찾아올 때마다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나를 기다리는 이곳. 나는 그중에서도 맑고 화창한 어느 봄날, 계획에 없이 발이 가는 대로 걷다 마주한 그날의 공원이 제일 푸근하다. 미리 연락드리지 않고 깜짝 놀러 왔을 때 부모님의 반응처럼 그런 날 호수공원은 못내 쑥스러워하면서도 활짝 만개한 가지각색의 빛깔들로 나를 환영해 주는 것이다.


유난히도 햇살이 따뜻했던 올 해의 봄, 그 어느 날도 그랬다. 잠깐 집 앞으로 산책을 나온 나는 어느샌가 공원 초입에 도달해 있었다. 이미 꽤나 걸었지만 산들산들 나를 향해 손짓하는 저 꽃봉오리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그렇게 홀린 듯 나는 공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벚꽃이 만개한 호수공원


생각보다 포근한 날씨에 긴 옷차림이 다소 신경에 쓰였지만, 이런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산책로는 무성한 나무 그림자로 제법 시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오늘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나 보다. 공원은 이미 다양한 조합의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는 끼고 있던 이어폰을 살짝 빼 주머니에 넣은 채 혼자만의 여행에 빠져 들었다.


공원이라는 곳의 매력이 이렇다. 매일 같은 장소를 찾아가도 그곳에 기다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전혀 다르다. 그래서 찾아갈 때마다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공원이다. 타인들이 나누는 대화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되어 나 안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게 공원을 한 번 산책하고 나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진 모습으로 나 자신의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고독하기에 풍요롭다. 혼자서 다수가 되고, 그 가운데 홀로 구별되는 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내가 산책을 즐기는 이유일 것이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모이는 장소

천천히, 하지만 멈추어 서자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호숫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벚꽃은 참 오묘하다. 흰색도 분홍색도 아닌 그 작은 꽃잎들이 모여 파아란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그런데 그 대비는 거슬리지 않다. 되려, 벚꽃은 푸른 햇살을 받을 때 제일 아름답다, 그래서 벚꽃은 가을에 낙엽지지 않고 이른 봄날 홀로 고고히 피었다 지는 것이지 않을까. 자신이 오고 가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아는 저 벚나무가 참 부럽다.


어느새 걷다 보니 공원의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돌아올 때에는 이미 벚꽃이 다 지고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서 더 아쉽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저 벚나무가 가르쳐 주었듯 만남은 그 끝이 있어 더욱 아름답기에.

그림으로 남긴 호수공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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