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모든 난장이에게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by 공대 청년

2026년, 고작 22살이 되어가는 내가, 당신께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내가, 진정으로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경험도 많지 않은 내가, 감히 당신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차마 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처지를 잘 압니다"라는 말을 할 때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다는 말을 사람에게 쓸 때, 사실은 굉장한 폭력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식화 한다는 것.

그의 내면과, 그 내면을 이루어 온 주변 환경 및 사회마저 단순한 파편들로 환원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은 늘 유동적이며, 그 속은 실로 광대하다.

사람의 마음이란 너무도 복합적이기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슬픔'이나 '동정' 따위의 단순한 단어 대응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당신께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내 과거의 경험 속에 그 답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크나큰 사건을 계기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슬픔은 지나간다. 지금의 슬픔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성장해 나가자.-

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슬픔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차마 타인에게 건넬 수는 없었다.

당시 그에게, 지금의 슬픔도 곧 지나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는 제삼자의 슬픔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이었다.

지금의 감정을 희석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미 머리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정답에 가장 근접한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지금 처절하게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거야"라는 의미의 위로 말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이 정답을 내미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력한 일이었다.

성급한 치유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정답을 제시하는 것도 어리석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네 곁에 내가 함께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랬다.

신속한 진화(鎭火)가 통하지 않는 마음속의 불길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응시해 주는 것이 유일했다.


나름의 방향을 찾은 것 같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는 당신께 현실 타개를 위한 대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일순간에 뭉클하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도 없다.

다만 당신을 인지하고 있으며, 당신 스스로 '변명'과 '핑계'라고 폄하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찾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위로의 방식이다.



"역시 교회는 세상과 달라"

교회에 나가보면 목회자의 설교 혹은 구성원과의 담소로부터, "역시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달라"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나 또한 교회에 관성적으로 출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말을 아주 오래전부터 질리도록 들어왔다.

어느 순간, 이 주장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다르다"는 주장의 근거가 단순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연결된다"라면, 단어 수준에서 깊게 분석해 볼 때 서로 순환하고 있는 명제들이나 다름없다. 이 주장에는 종종, “뭇사람이 그랬다더라”라는 수식어구를 덧붙여 통계가 뒷받침되었다는 듯한 암시를 표현하는 방식이 따른다. 혹은 “말씀이 삶에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단정으로 판단을 추상적 진술에 의존하게 만들고, 반박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룩함이나 구별됨이라는 경험이 반드시 성경에 적힌 활자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 안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예컨대 한 사람의 인생 롤모델로부터 삶의 태도와 가르침을 얻는 순간들이 그렇다. 단지 그것이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가치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주장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더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위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단순히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기 때문에 거룩하며 세상과 구별된다"의 수준에서만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더 중요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세상'의 어떤 부분을 겨냥하며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는가.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도식은 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을까?

정말 이 견해는 단순히 종교적 관점에서만 해석되는가?


이 질문은 나의 사색을 자연스럽게 종교의 영역에서, 사회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나는 논의의 범위를 대한민국 사회로 확장하되, 동시에 그 안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교회'로 표상되는 가치들의 탐구에 비중을 두는 반면, 나는 '세상'에 그 비중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떠한 가치를 결핍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내가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며 던지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동시에, 교회에서 출발한 나의 사유가 끝내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이기도 하다.


종교로의 도피만으로는 이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단순히 '세상은 원래 부정적이기에 종교가 필요한 거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세상'의 어떠한 결핍이 개인을 지치게 했으며, 도피처를 찾게 하는 것일까.


나의 견해는, 그 결핍의 중심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온 하나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면 속에는, 산업화 시절의 자본주의 이념이 매우 깊이 스며들어있다. 이는 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힘이 된다. 그러나 이 이념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순간, 그 본래 의미는 변질된다. 이미 한국 사회는 산업화 시절 자본주의가 표방하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을 계속 헤매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절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접하게 된다. 물질에 임의로 값을 매기거나, 희소성에 따라 물질의 가치와 급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살아있는 것 마저도 물질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내포한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가치를 나열하는 사고는 결국 정량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에 일률적인 상표를 달아놓는다. 그 결과 사람은 사회의 상품으로 알맞게 재단되어 세상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인간과 이념의 선후가 뒤바뀐 것이다.


6-70년대부터 8-90년대까지의 초고도 압축 성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한 감정적 고양감을 선물해 주었다. 이는 자본주의를 향한 강한 신뢰감과 맞물려 집단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불러왔다. 투입량 그대로 만족할 만한 결괏값이 나오던 그 시절의 광경이 '노력'과 '성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노력하면 된다’라는 절대 명제가 탄생했고, 이는 대한민국의 한 세대를 풍미하는 하나의 주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절대 명제는 곧 결과중심주의와 결합하며, ‘결과 = 노력’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창조하게 된다. 마침내, 성과가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레 ‘나태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라는 낙인이 부여되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20세기말에나 통하던 그 시대의 공식을, 복잡/다원화된 21세기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사회적 관성에 있다. 그리고 그 관성은, 현재 대한민국의 어른 세대를 통해 가장 강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는 달라졌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은 정말, 매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소위 말하는 '성공'에 이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부모세대의 재산 격차에 따라, 최저시급을 벌어가며 공부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학점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유명한 예시가 된다. (사회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뤄두자). 국가는 더 이상 개인에게 무관심하다. 구성원을 귀하게 여기기는커녕, 전쟁터에 던져두고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놀라운 것은, 이 국가는 그 책임을지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한 자에게 노력이 부족했다는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어른들, 살아남은 자들, 심지어는 살아남지 못한 자들마저도 묘하게 이 순간만큼은 단합하여 실패자를 향한 비난과 조롱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조롱받는 자마저 남들의 평가에 위축되고 순응하게 되는 상황은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이 사회에 질문을 더 던져보자.


남들이 말하는 좋은 학벌을 지니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수준이 떨어지는 일이 되는 것인가? 그럼 반대로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막연히, 혹은 통계적으로 격이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적당한' 정도의 노력을 한 실업자들이 정말 하찮은 존재들인가? 반드시 '죽을 만큼' 노력해야 멋지고 바람직한 사람인가? 워라밸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100%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언제부터 우리 사회는 200%, 300%의 노력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사람에 딸린 '상표'를 중요시하는가? 왜 우리는 늘 서로 비교하며 급을 나누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대한민국을 살아가며 한 번쯤은 들어봤을, 또는 생각해 봤을 위의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앞서 기독교인들이 말한 주장 속의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을 결핍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람답게 보는 법을 망각했다. "괜찮다"라는 말의 사용법을 잊었다. 우리의 찬란한 미래도 잃어버렸다. 또한 우리는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렸다. 더 정확하게는, 그에 대해 질문하는 힘을 잃었다. 이 사회는 그런 '비효율'적인 질문들에 오랜 시간을 쓰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 지친 자들에게는 종교란 유토피아와 같다. 그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절대자를 향한 '믿음'만으로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만으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이 성역(聖域)이야말로, 그들이 세상과 다르다고 평할 만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지친 자들도 세상의 지옥화에 일조한 이들이라는 것.

성역으로의 도피가 단지 도피만으로 끝난다면, 이 난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는 과연 자유로웠는가.


나는 어떠했는가.

과정이 가장 가치 있음을 주장하면서도, 결과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무시할 것만 같은 타인들이 두려웠다. "물론 저도 열심히 해서 이런 결과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결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따위의 구질구질한 문장을 덧붙이는 내가 부끄럽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 박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들의 공동체에 나도 속해야 한다는 당위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분명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장난감' 같은 사회로부터 '무시'당할까 봐 나는 끊임없이 '성과'에 목말라했다. 더 나아가 그 끝없는 갈증을 숨기려 애쓰고, 겸손한 척했던 나 자신을 떠올릴수록 거대한 수치심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한국이 싫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자 내 사색의 단초가 되었던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는 8-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이미 겪었던 실화와도 같을 것이다. '노력의 신화'.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삶이 보장된다는 말을 신뢰한 이들. 한국의 어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 그대로 녹아든 입시 생태계를 정통으로 돌파해 온 세대. 학벌, 취업, 결혼, 내집마련, 출산과 안정적인 노후대비가 대한민국에서 '노력'만 하면 가능하다는 명제를 신뢰해 온 세대. 그러나 그 명제는 '노력'을 엄밀하게 정의하지도 않으며, 그 루트에서 벗어난 개인은 비정상이라는 다소 폭력적인 주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2010년대, 우리나라에는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탄생한다. 절대 진리라 여겼던 그 명제로부터의 배신 앞에서, 이 세대는 한없이 무력하게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사회 분위기와 우연히 노선을 같이했던 것이지, 더 이상 '정상' 루트와 같은 안정적인 미래의 청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잃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한국이 싫어서>는 대한민국 사회에 지친 개인(등장인물 '계나')이 호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이유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단순히 지식인의 시선에서 날카롭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냉철함과 비판적, 합리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한국의 20대 주인공을 설정한 것이 내게 더 큰 몰입 경험을 선사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나태함이나 부족함, 또는 팔자 이상의 욕구나 욕망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 진솔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독자에게 터놓는다. 책에서 정확히 언급한 내용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돈은 없는데 역세권에서 살고 싶어. 출근하기 힘들잖아."와 같은 넋두리 말이다(물론 바라는 게 매우 많은 인물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본인의 넋두리가 이 한국 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한국의 분위기에 '짓눌린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불확실한 전망이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원인은 대한민국 어른들의 인식이었다. 어른들의 내면을 구성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 사람을 상품화시켜서 그에 딸린 상표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그들의 기준은 너무나도 완고했다. 결국 그 기준과 충돌하는 새로운 세대는 힘이 없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 충돌의 패배는 젊은 세대의 몫, 주인공 계나는 현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호주로의 도피를 택한다. 그러나 그 도피는 완전한 해결이 될 수 없었다. 국경을 넘어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정글과 같았다.


자신의 행복을 하나, 둘... 포기하던 N포 세대는 결국 대한민국을 포기했다. 이는 꼭 국적을 포기한 경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좁은 울타리 안에서 목적 없는 무한 경쟁에 지쳐 포기한 이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그들도 젊고 불타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젊은 마음이란, 그 경쟁에는 끝이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든 동아줄을 붙잡으려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을까. ‘위’로만 향한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빛줄기는 과연, 자연이 내린 햇빛이었을까, 아니면 이 사회가 만들어낸 인공조명이었을까.


동아줄을 놓아 추락해 버린 이들의 변명에 경청해 보았는가.

당신의 그 '노력'을, '시선'을, 그들을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소모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주인공 '계나'의 속마음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장강명 작가를 통해, 또 우리 주변에 존재할 법한 인물인 계나를 통해, 조금 더 진실하게 대한민국을 재조명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논점 일탈을 막기 위한 언급 사항-
-종교를 단순히 '세상의 도피처'의 수준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왜 종교가 도피처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언급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른들'이라는 표현은 정서적으로 꽤나 강력하고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의 삶과 경험, 지혜를 무시하는 표현이 절대 아니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거나 그 세대를 비난하기 위한 단일 목적을 위해 쓰인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제게도 역시 저를 성장시킨 '참된 어른'들이 이미 주변에 함께하고 계시며,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해당 문구를 '어른'이 아닌, '사회 구조'에 초점을 두어 해석해야 합니다. '시대 조건' 비교의 맥락에서 바라봐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우리나라 사회 구조의 문제점 혹은 부정적 측면 언급 부분에 있어서 자세한 수치적 통계나 사례를 첨부하여 뒷받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사회를 분석 및 비판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님과 동시에, 증거 자료들을 제시할수록 사유의 흐름이 길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여 의도적으로 배제하였습니다. 혹여 이 글에서 등장하는 부정적 비판이 그저 근거 없는 전제에 기대어서만 전개하고 있는 논리라는 평가를 내릴까 하는 우려에 언급합니다. 뉴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청년 실업, 헬조선, 서민 경제, 내 집 마련' 등의 키워드가 이 사회의 주된 관심사가 된 '배경'을 고려하여 판단해주십시오.
-위 글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한다는 내용의 주장이 아니며, 저는 사회 체제의 이론적 성격 자체를 논할 지식 또한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체제에 과하게 의존하는 사람의 내면에 비판의 포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결과는 중요합니다. 노력과 결과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온전하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자세를, 단순히 사회 구조 탓을 통해 무조건적 변호를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글의 논의 대상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성찰이 부재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준을 명확히 수치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독자가 힘든 처지에 놓인 이들을 향한 너그러운 시선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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