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관, <구부러진 길>
언제나 그렇듯, 새해를 맞이할 무렵이면 마음이 몽롱해진다. 동시에 특유의 긴장과 기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신경을 자극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그저 하루가 이어지는 것일 뿐임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신년을 맞이하는 이 들뜬 환경의 영향권에서는 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처음'이라는 말 앞에서 소극적인 흥분감을 느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람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사실 나는 처음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한다. 무언가의 시초라는 의미도 있겠으나, 내가 이 단어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심상은 설렘이 안개처럼 자욱한 하늘과 같기 때문이다. 설렘... 무엇보다 그 '설렘'이라는 감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마취시키는 매력적인 감정이다. 신년을 맞이하는 이 시기는, 우리는 모두 그 설렘에 매혹된다.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그러나 분명히 행복해진다. 2026년은 처음이기 때문에, 그것도 우리 모두에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년 맞이라는 작은 의식 속,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소박한 표현을 빌려 우리는 잠시나마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365일을 주기로 새해를 맞는 우리는, 또 그렇기에, 매년마다 처음이 지닌 설렘을 마음속에 품는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불과하지만, 다가올 시간이 지나간 시간과는 다르기를 내면 속에서는 끈질기게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2025년은, 처음으로 대학 입시라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그마저도 넓다고 하기 부끄러운 대학 새내기 생활을 시작했던 해였다. 그렇게 2025년을 처음 맞이하여 1년을 살다가 물러난 '나'는, 26년을 맞이하는 '나'에게 훌륭한 비료가 되어주었다. 지난 한 해는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많은 경험과 배움을 접했으며, 그만큼의 아픔과 아쉬움도 겪었다. 수많은 새 책들과 인연을 맺었고, 새롭고 소중한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나와 스쳤던 사소한 인연까지도 모두 기억하며, 모든 인연에 감사한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 덕분에 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의미하는 성장은 물질적, 수치적 환산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한 해 동안 내게 일어났던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비물질적, 관념적 의미의 성장이라 해두자.
나는...
건강에 감사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슬픔을 나누면 둘이 아니라 반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는 홀로 침잠한 존재에게, 함께 아파하자고 말할 수 있다.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결코 약함이 아닌 강함임을 알았다.
차가웠던 유년을 온전히, 그리고 따스한 시선으로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강인함도 얻었다.
사소한 것들에게도 시선을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법을 익혔다.
대화 속에서도 나의 중심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무엇보다,
세상의 수많은 오점과 불협화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 모두, 즉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야,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볼품없는 면을 감추려고 애쓴 시간도 있었다. 타인을 쉽게 정죄하거나 질투에 사로잡혔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나'를 품기에는 마음의 그릇이 작았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나는 정말, 정말로 작은 존재였다.
그러나 내게 채찍을 들 이유는 없다. 나에게는 치료와 보완이 필요했을 뿐, 채찍질은 온전한 자기 성찰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지닌 약점, 과거에 저지른 스스로에 대한 실수와 실패들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를 이루고 있음을 시인(是認)하고, 마침내 나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로소 나의 존엄과 개성을 온전히 지키면서도, 타인의 존엄과 개성에 망설임 없이 칭찬을 건넬 수 있다.
한 해의 시작은 우리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처음이란 설렘과 기대를 지닌다.
그러나 누군가 말하길, '미숙함'도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수치(羞恥)들은, 모두 미숙(未熟)에서 비롯되었다.
그래, 미숙했을 뿐이다.
두 해가 맞닿는, 즉 끝과 처음이 맞닿는 순간은 1년마다 돌아오기에,
우리는 늘 처음인 동시에, 늘 미숙하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적어도 나의 삶은, 언제나 미숙했고, 미숙하며, 미숙할 것이다.
매년마다 설렐 것이며, 매년마다 미숙하리라.
미숙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넘어져 아파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때, 그 미숙했던 자신을 반드시 기억해내야만 한다.
그 서투름, 혹은 순결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주 느리게 퇴적된다.
퇴적층의 단면을 멀리서 조망할 때면, 간혹 짙고 어두운 잿덩이가 층을 이루고 있더라도 포용하자.
두껍고 화려한 결실이 엿보이는 층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자.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다음 해를 살아내자.
과거를 껴안고, 미래의 불확실함을 견디면서도 더 나은 현재를 살아내기를.
과거와 화해하고 성찰하며 2026년을 그려 나가자.
조금 더 실체가 있으며 힘이 있는 가치를 쓰고 말하는 사람이 되자.
나의 시선이 위로만 향하지 않도록, 나의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 세상이 고통받지 않도록 하자.
공부를 더 성실히 하고, 더 많은 책을 읽으며, 더 깊이 생각하자.
작은 것에 쉽게 투정하며 분노하지 말자.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을 더욱 열심(熱心)으로 성의를 다하고, 인내하며, 배려하는 사람이 되자.
처음이 주는 설렘에 취해, 나도 모르는 사이 간단히 짧은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이번 글의 목적은 사실 문학 작품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기 속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2025년이, 나의 2026년을 위한 다짐이, 단지 나만의 것으로만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글에 관심을 가져준 당신께 감사를 표하며, 이준관 시인의 시 한 편을 공유하고 갈무리한다.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음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