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급류』
휩쓸린다.
나는, 혹은 우리는, 이를 막아낼 힘이 없다.
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설명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이었다.
제어할 수 없다는 감각만이 먼저 몸에 남았다.
'그것'은 가끔 나에게 시린 흉터를 남기기도 했다.
육체는 그 시린 감각에 괴로워했고, 정신 또한 날로 피폐해져 갔다.
알고 보면 흉터까지가 '그것'이 주는 고통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잔인했다.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한없이 나약할 때, 발버둥 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나를 휩쓸었다.
그래, 휩쓸었다는 표현이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
이곳에 남겨진 말들은 언제나 사건보다 늦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고통은 늘 사건과 함께였고, 말은 그 뒤를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할 줄 아는 생명체임을 실감한다.
'그것'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잔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급류'라고 불렀다.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고, 저항할 수 없다는 무력감까지 느끼게 해 주던 그 '급류'는
그래, 나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헤엄치려 해 보아도, 급하게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 해도,
그때마다 급류가 내게 속삭이던 소리가 이제야 선명해진다.
"넌 절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대비할 수도 없었지. 이는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말 그대로 필연이었다", 고.
급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많지 않았다.
체념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한 순응도 아닌 상태.
그럼에도 분명히, 그 둘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것들이 있었다.
급류가 잠잠해질 때쯤, 우리는 상처받은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다.
곧 흉터투성이가 되어버린 우리의 육신은, 그 흉터를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 호기심은 손으로 하여금 흉터를 더듬게 한다. 따끔거리고, 지끈거리는 감각들이 과거의 기억들과 겹쳐진다.
감각과 기억이 공존할 때,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는 순간, 마침내, 우리의 시선이 미래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급류』를 읽기 전-
입시 공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을 접한 후, 한국 문학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흥미는 점차 발전해나갔다. 이는 대입 이후 나의 독서 습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어느 순간부터, 읽는 책의 대부분이 한국 문학이 되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장르에 나는 깊이 빠져있을 것이다.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전공하지 않은 이상 학부생 수준 이상의 깊이 있는 감상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나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게 나의 평생 다짐이다. 시나 수필,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소설을 넘어, 평론과 문학사적 연구와 관련된 서적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는 중이다.
이런 간략한 배경에 기대어 나의 무의식 속에 만연했던 한국 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그 시절의 사회가 지닌 거시적 담론과 깊이 얽혀있는 그것이었다(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의 고민거리들로부터 왔을 것이다). 물론 한 작가가 지닌 개성 있는 시선이나 독창성, 또는 독보적인 고유성과 위상 또한 작품 해석과 감상에 매우 큰 비중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세기의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의 10년을 단위로 격렬하게 변화해 온 역사적 서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시대적 상황이 소수 개인에게, 더 나아가 소설 속 인물들에게 공통된 집단적 상처를 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산업화 시절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자들, 환경 파괴와 고향 상실, 급격한 도시화가 발산하는 찬란한 광채와 그에 대비되는 사람들의 삭막한 내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클리셰 속에서 작품을 이해해 보는 것도 감상의 깊이를 깊게, 넓이를 넓게 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21세기 즈음에 와서는 점차 주제 의식이 다원화되기 시작한다. 정치, 사회, 군사, 경제적 요소들이 우리나라 개인에게 과거만큼 깊이 관여하는 세대가 아니기에, 이제는 시대가 지닌 필연을 짊어지는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개인을 궁금해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형성하게 된 듯하다. 물론 200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폭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작품들, 개인 서사 속에 구조적인 문제가 잠재된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다원화'였다. 하나의 상처 대신, 저마다 다른 상처들이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한 서사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내게는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들이, 내가 읽은 가장 최신의 한국 문학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책들은 접해본 적이 많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인의 추천을 받아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분명 대형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이달의 베스트셀러 진열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책이었다. 이왕 추천도 받았고, 연애를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한 시간에 80 페이지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금방 읽고 해치우자는 생각에, 나는 처음으로 2020년대 한국 문학에 입문하게 된다.
-소설 『급류』를 읽은 후-
소설의 서사는 도담과 해솔이라는 인물들의 사랑이 이끌어나간다. 그러나 이 사랑은 매우 어둡고 질척인다는 점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새로운 사랑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한 것 같다. 일종의 피폐함과 공허감을 끌어안은 사랑.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주는 찝찝함이 느껴지는 사랑이었다.
인물들은 고등학생 시절 처음 만난다. 만남과 함께 도담과 해솔은, 도담의 아버지와 해솔의 어머니의 불륜, 죽음이라는 사건을 접한다. 독자에게는 꽤나 큰 자극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사건은 도담과 해솔에게 일어난 급류,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된다는 설정이다.
사실 두 인물은 부모님의 사건이 지닌 불명예와 수치심, 고향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 섞인 시선, 상실의 아픔, 주변인들의 내적 고통 등의 다양한 사건들을 어린 나이에 겪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로써 둘의 관계는 단순히 연애의 감정만 느끼는 관계가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러운 과거를 ‘유일하게’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뒷 줄거리는 두 인물이 청년기와 성숙기를 지나며 과거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워가는 성장 서사가 주를 이룬다.
말문을 트게 한다는 것은.
아픔을 지닌 자의 말문을 트게 한다는 것은, 항암 치료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과거를 향해 방사선을 조사시키는 것.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다른 부분도 있다. 암을 제거하는 방사선 치료와는 다르게, 말문 트기는 그 어둠의 덩어리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짙게 응고된 어둠을 희석시키는 과정과 같다. 너무나 어두워 볼 수 없었던 마음속의 종양은, 결국에는 한때 우리를 이루려 했던 세포였음을 깨닫게 된다.
도담과 해솔은, 삶에 영원한 의문으로 남았던 일들에, 공포로 각인된 일들에 저항한다. 미성숙한 청년기에는 두 인물이 상처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도담은 어둠을 온전히 바라보려 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망각하려 애쓴다. 공포와 상실감, 배신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종의 진통제(클럽, 술, 담배, 동아리 등)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 한편 해솔은 아주 큰 죄의식을 지니며 '희생'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와 집착을 보이게 된다. 이는 과거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지만, 아직 그것을 견딜 경험과 시간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환각제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이 소설에서 말문 트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두 인물 앞에 놓인 시간이다. 이렇게 두 인물은 청년기에서 성숙기를 거쳐 점차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둘은 재회와 이별을 반복하며 과거를 공유한다. 즉 시간의 흐름은 점차 말문을 트게 한다.
소설 속 사건이 발생한 2006년, 그들의 성장은 멈추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죄의식을 지니게 됨으로써, 그들의 성장은 정체되어 있었다. 후에도 마치 화상을 입은 살과 같이 고통을 겪는다.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해 둘은 상처를 긁어내 보이지만, '급류'의 힘이 너무 강력했던 탓인지 좀처럼 돋아나지를 않았다. 그들은 점점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정처 없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끊임없이 가라앉는 시간이 지나고, 끝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를 멜랑콜리의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아주 깊은 침잠을 경험한 두 인물이, 그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성장을 재개시키는 과정이다.
'급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의 제목으로 쓰인 '급류'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자연 앞에서의 무력감, 갑작스러운 전환점을 동시에 의미한다. 도담과 해솔에게 얽힌 인연을 이끌어가는 초월적인 힘과도 같다. 이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으며,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작가가 허락한 유일한 생존 전략은 '중성 부력'으로써(책에서의 표현을 빌리면), 그 흐름에 순응하는 것. 처절하게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마침내 자신과의 용서에 도달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변해(辯解)와 기타 해석
10대와 20대에서 이 책에 대한 수요가 굉장했다는 정보를 접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나름 분석해 보자면, 서사의 높은 몰입도, 문장이 지닌 단순함과 명료함, 여러 은유 장치의 직관적 이해, 다수가 흔하게 공유할 수 있는 이미지들의 표현으로 심상을 떠올리는 시간을 단축하게 했다는 점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본인 또한 읽기 전에 추측했듯이,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독서의 카테고리를 나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작가가 새로운 사랑을 정의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음을, 두 인물의 절절함 속에서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이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통한 것 같다. 아마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리라.
새로운 사랑의 정의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면, 이들의 사랑은 운명적, 몽환적, 세기말적 감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사랑'에 '유일'이라는 관념을 덧붙인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사랑에는, 진실하고 순수하며 서로만이 서로의 모든 것을 끌어안겠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이 그린 사랑이 그 현실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 그 사랑의 종류가 새로운 듯 하지만 이미 젊은 세대 사이에서 대중매체 플랫폼을 이용해 가볍게 소비된 적이 있던 종류라는 비판도 있다(피폐함을 추구하는 연애 심리). 또한 '이해하기 쉬우면서 심오함을 흉내 낸다'는 비난(?)까지 보았다.
물론 비판과 비난이 발생한 원인, 그 본래 의도는 이해하고 있다. 문학이란 생각을 지연시키고, 그 지연이 크나큰 결실을 보장하고 있을 때에 그만의 가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급류>라는 소설 자체보다, 소위 '쉬운' 문학이 주류가 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쉽고 어려움에는 개인차가 너무나 크지만, 현학적이거나 유려한 문장이 많이 쓰였는가, 추상적 관념의 깊이가 깊은가 하면 비교되는 작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비난에 대해, 나는 나름의 답변을 달아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21세기는 하나의 시대적 과제를 공유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개인으로서의 개인이 중요하다. 문학 또한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며 다양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문학에서 하나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정교하게 제시하는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한 개인의 내면을 어디까지 밀도 있게 따라갈 수 있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힘이 계속해서 쏠리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 쏠림의 중심에는 '개성'이 있다. 여기서의 개성이란 기이함이나 새로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마다 다른 속도로 아파하고, 다른 방식으로 침잠하는 개인을 조명하는 '특별함'이 담긴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단의 설명이 20세기의 소설들은 개성이 불충분했다는 주장의 의미로 오해할 수 있으나, 절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급류』는 무엇을 새롭게 말하려 하는 소설이라기보다,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즉 도담과 해솔이라는 두 인물이 감당하지 못했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 가는지를 서두르지 않고 지켜보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하기보다(깊이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독자들 과거의 경험과 개인적인 감각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래서 이 『급류』라는 소설은, 충분하다. 이는 '쉬움'을 목표로 한 책이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의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끝까지 추적하는 이야기이며, 그 내면을 비교적 솔직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로써 이 소설은, 기존의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지점에 성실하게 닿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