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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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喪失)의 기억을 되짚으며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나에게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듯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단호함과 견고함, 잃어서는 안 돼, 이러한 심상의 연쇄가 이어진다.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머릿속에 주름을 긋고,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 마음의 공간을 차지한다.
마음 한편을 차지해 버렸다는 사실이, 아려오는 듯한 기분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상실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 답을 지닌 기억들을, 왜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찾는 것인지 스스로 납득하기 시작한다.
만약 '상실'이 내게 일어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의 마음에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이 흉터에 나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공백, 아니, 공허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공적(空寂)과 허탈.
아마도 텅 비어있는 기분을 떠올린 것이다.
텅 비어있는 공간 속 외로움에 젖은 사람을 떠올린 것도 있다.
아니다.
충분하지 않다.
나의 마음을 차지했던 그 무언가가 빈 자리는, 공허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했다.
그것은 분명 실체가 있었다.
비어있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말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 비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 어떤 빛도 흡수해 버리는, 먹물과도 같았다.
먹물이 차올라 출렁일 때마다, 나의 마음과 머리 또한 균형을 잃었다.
먹물이 가끔씩 흘러넘칠 때면, 그것은 투명한 눈물이 되어 건조한 피부를 적셨고, 한 줌의 회한이 되어 나의 머리를 어지럽혔으며, 선홍색 피를 검붉게 만들어 내 전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나는 중요한 것을 왜 잃었을까.
왜 사전에 막지 못했을까.
신기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상실을 경험하기 전부터 해답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은 되풀이되었다는 것.
연인과의 이별, 소중한 존재와의 사별,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던 공간과의 단절 등.
헤어짐의 정서는 상실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었다.
그 헤어짐을 의도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하는 건 중요치 않다.
나뿐만 아니라 대개 사람들은 헤어짐을 경험할 때 후회의 정서를 느끼는 것 같다.
많은 문학 작품들을 보아도, 영화나 음악을 감상해 보아도,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과거에 미숙했던 본인을 탓하는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할 수 있었음에도, 그때 왜 그래주지 못했을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익숙함에 속았다', 고, 핑계를 붙이기 시작했고, 너무나 많이 되풀이되는 탓에, 이 회한의 문구는 그 스스로가 품은 '익숙함'에 묻히고 만다.
사실 나도 '일상'이라는 단어가 부리는 마법에 걸린 듯이,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마치 변하지 않는 상수와 같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
시간이 흘러도 내 곁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생의 고통을 겪는 것과도 같기에, 그 어떠한 고통에도 소중한 것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우리의 무의식이 믿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 한 새에...
따라서 이 우주가 지닌 시간의 흐름은 아무래도 우리 인간과는 맞지 않는 듯하다.
우리 인간은 '적응'이라는 저주 아닌 저주에 걸렸기에,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시간조차 머릿속에서 길게 늘어뜨리고 만다.
1년, 2년,...,10년, 20년,... 이 시간이 우리의 '적응'이라는 생존 기제에 의해 알맞게 재단되는데, 이는 소중함을 향한 간절함 마저 싹둑 잘라버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함이라 불리는 그것을, 주기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 혹은 저주에 걸린 생명체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엄마를 부탁해>
<외딴 방>이라는 작품을 처음 접하고 난 뒤부터, 나는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마음속에 지니고 살아가리라 다짐했었다. <외딴 방>의 주인공이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중히 여겼듯이, 나 또한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품고 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명확히 단정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유를 너무나도 섬세하게, 톡 건드리기만 해도 상처입을 것처럼 연약한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이어나가는, 그 과정을 글로써 사실감 있게 표현해 내는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해도, 이는 다른 작품에도 붙여 쓰면 성립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말이기 때문에 함부로 단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평론가로 불릴 만큼의 안목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작품 전체가 지닌 가치를 온전히 언어로 옮겨 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하나의 해설이기보다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내 안에 남은 감정과 생각의 기록에 가깝다. 결국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작품을 직접 마주하고, 그 감상을 나의 성찰과 나란히 놓아보는 일만이, 우리가 이 글을 통해 서로 닿을 수 있는 방식일 것이다.
이 소설의 첫 페이지, 첫 문장.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이 문장은 <엄마를 부탁해>라는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되짚는 반추의 시간을 개시하는 하나의 명령어처럼 느껴진다. 자식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어머니가 기차역에서 실종되며 소설은 시작된다. 작품의 초반부는 실종된 어머니를 찾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초점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놓여 있다.
<엄마를 부탁해>의 핵심은 결국 가족들의 반성과 성찰이다. 익숙함에 속아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들, 당연하다고 여겼던 관계의 균열을 되짚으며, 가족들은 ‘엄마’라는 존재를 다시 구성해 나간다. 잃어버린 이후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어머니의 일생과 내면,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한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속 성모는 전 인류의 원죄를 껴안고 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원죄를 껴안은 자신의 자식을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몰아치는 감정을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의 '엄마' 또한 이와 비슷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신성한 영역의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딸’이었고, 그보다 앞서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욕망하고, 외로워하고, 좌절했을 한 여성의 삶. 늘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었던 존재의 흔들림을 소설 속 가족들은, 나아가 우리는 너무 늦게서야 발견한다.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전까지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는 자각 앞에서 가족들은 슬픔과 후회에 잠긴다. 그러나 이 비극은 동시에 가족들 간 단절되었던 소통을 다시 이어 붙이는 계기로 작동한다. ‘어머니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통해 가족들은 비로소 서로의 감정을 꺼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엄마를 부탁해>는 모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감정을 자극하는 서사로 읽힐 여지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이 단순 연민과 모성애 자극에서 멈추었다면, 그 울림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실이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되묻는다. ‘너’, ‘당신’이라는 호칭을 통해 이야기를 인물들만의 세계에 가두지 않고, 독자의 삶으로 끌어오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책을 덮은 뒤 우리는 자연스레, 각자의 삶에서 소중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엄마’ 일 수도 있고, 익숙함에 가려 미처 돌보지 못했던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자신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어떤 것, 그러나 동시에 권태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금 성찰할 기회를 마련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상실의 의미를 다시 음미할 수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소설을 다시 펼치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혹시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야 다시 이 책을 찾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실의 경험은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고, 감정적으로 성숙해 간다. 설령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그 미숙함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것은, 상실을 겪지 않는 일이 아니라, 상실 이후의 자신을 조금 더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