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표백>, 한겨레출판
세상이 너무 완벽하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완벽한 건 아닌데 완벽한 것 같은 거 있잖아... 그래, 내가 낄 틈이 없다는 생각말이야. 아무리 내가 나선다고 해도, 거창한 일을 맡을 수는 없는 듯한 기분.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개척하려고 해도... 내 머리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창의력을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안 그래? 내가 떠올린 생각들은 이미 이전에 누군가가, 훨씬 더 깊이 있고 훌륭한 방식으로 발표까지 끝내놨더라고. 물론 세상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지. 예를 들면... 동물권 보호라든가, 노인 복지, 성소수자 인권 등등이랄까. 근데 그게 지금의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고. 그런 문제들이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까지 살피기에는 나 살기에도 급급한 걸 어떡하니.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올까? 내가 말하는 완벽하다는 게 부조리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과거에 비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살기가 너무 편해졌다는 말이야. 그래, 내가 지금 관심을 갖는 게 그 문제인 것 같아. 지금의 세상은 너무 편해졌어. 과거와 비교하면 말이야. 당장의 생존을 해결해야 하는 다급한 사회가 아니잖아. 생존 문제를 넘어 이제는 자아실현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근데 이상해. 난 과거에 비해 너무나 태평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마음속에 뭔가가 자꾸만 걸리는 것 같아. 난 행복한가? 과거에 비하면 나는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살기 좋아졌다고 해도 그게 내가 사는 이유와 무슨 상관인지 싶어.
솔직히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 나는 충분히 안정된 환경에 있어. 굶지 않고, 공부할 수 있고, 인터넷으로 세계의 지식을 접하기도 해. 그런데도 묘하게 공허한 거 있지. 이런 환경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밤마다 떨칠 수가 없어.
나도 내 마음이 명확히 어떤지 모르겠어. 그냥,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겼어. 세상은 살기 편해졌는데,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그곳에 내가 서 있을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데 말이야.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 이게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위한 건지 모르겠어. 뛰어난 사람 말고, 그냥 '평범할 뿐인' 내가, 대단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과거에는 각 세대가 짊어져야 할 과업이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가 성장. 근대로의 이행, 개인의 발견, 경제 성장, 신분제 타파 등.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명확한 과제도 있었고, 각자 자기네들의 이상적 이데올로기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전히 경제 성장은 물론, 노동자 인권 투쟁이나 법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들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근대 산업 자본주의를 넘어선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들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공동의 거대한 과제들이 존재했다. 그 과제들은 참여자 모두에게 동일한 탁월함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수에게도 참여의 자리가 있었다. 눈앞의 생존의 문제도 중요했지만, 모두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서, 당연히 해야 할, 당위(當爲)가 그들의 삶에 함께 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개인이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위는 개인이 아닌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며, 이 사회의 구조는 그들로 인해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그렇게 언제나 '해야 할 것들'이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당위의 고갈 혹은 기존당위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너무나 고도화, 혹은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전문성과 자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평범'한 이들이 끼어들 틈은 역시나 좁아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사회체제가 안정되고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파이가 많이 남지 않았다. 각 조직의 관료화가 완료돼 조직 내 세대교체가 쉽지 않아 졌고..." - p.29
그러나 다른 국가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이뤄온 성장을, 그들은 고작 몇 십 년 만에 이루어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왜 노력하지 않느냐'는 세대와, '저도 할 만큼 했습니다'는 세대가 공존하게 된다.
<표백>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위의 분석은 주인공 '세연'의 시각과 유사하다. 세연은 우리 청년 세대가 '가치 있는 삶'과 '안정적인 삶' 모두를 잡을 수 없는 세대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후에 그녀만의 '자살 선언'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사회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된다. 세연이 규정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 즉 우리 세대의 정체성. 구조는 안정화되어감에도, 개인은 왜 점점 더 불안한지. 앞으로의 세대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는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대한민국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연'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바라보기
현재의 청년 세대는, 모두가 동의할 만한 마땅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윗세대와의 상대적 비교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개념인데, 앞서 언급한 '외적 당위'와 관련이 있다. 언제나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발 앞서 존재했던 그 세대는, 그러한 과제로부터 일종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대략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부터는 더 이상 그러한 세대 구분론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관점은 p.27 세연의 잡기(雜記) '큰 꿈 없는 세대'에 잘 드러난다. 이 잡기에서는 청년 세대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사회의 시도를 볼 수 있다. C세대, P세대, U세대... 등의 여러 가지 개념이 등장하지만, 세연이 보기에는 그 무엇도 청년의 삶을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 이는 그녀만의 세대 규정, '큰 꿈 없는 세대', 이후 더 나아가 p.186에서 '표백 세대'라는 결정적인 개념을 탄생시킨다.
우선 '큰 꿈 없는 세대'라는 것은, 앞서 살펴본 대한민국의 역사적 흐름과 국가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다. 국가 성장의 흐름 속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체제가 안정화 되는 중'이라는 감각. 이 두 가지 측면이 부재한 현세대는 '큰 꿈'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세연이 채택한 전제이다. 과거에 이미 근대 체제로의 편입, 민주주의, 선진 자본주의의 정착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을 이미 달성했다는 것이다(p.30). 그다음에 등장할 과제들은, 한 세대의 과업이나 종교의 대용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표백 세대'가 탄생한다.
'표백'이란 착색을 제거하여 하얗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어휘다. 착색, 얼룩. 이는 군더더기, 쓸모없는 것이다. 이를 세연의 관점에 접목시키면, 현 사회의 인식에 반(反)하는 목소리는 모두 얼룩이 된다. 이 사회는 수 백 년간 작성해 온 '오답 노트'가 존재하고, 그들만의 '정답'이 존재했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인식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성세대에 의해 강하게 재생산 및 확산되며 '주류'가 된다. 따라서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 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 p.191
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p.194의 세연의 잡기에서는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답'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꽤나 구체적으로 제시 돼 있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중략)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 p.194
완성된 사회속에서 표백 세대가 본인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방법은, 그렇기에 한정적이다. 부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더라도,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에서 벗어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부를 쟁취하는 싸움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이기 때문이다(p.195). 결국 표백세대는 적은 양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노력을 들여 동세대 및 기성세대와 경쟁해야 하며, 정작 소량의 몫을 차지하더라도 과거에 기대할 수 있었던 바와 일치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쳐 박혀야한다"는 책에서의 표현은, 이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아가 '실용'적이지 않은 활동은 단순 관심이나 재미 요소로 소비될 뿐, 이 체제 내에서 근본적인 가치를 주장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무의식이 팽배하다.
세연이 문제를 삼고 있는 지점은, 이 사회가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조적 모순을 방치하며 숨기는 것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해 보이는 것'뿐이다. 세연이 바라보는 '표백된 사회'는 성장이 둔화된 채, 모순을 알면서도 대안을 만들지 못해 불안이 다음 세대로 이월되는 사회이다. 그렇다고 당장 불안을 조장하는 것도 곤란한 처지이기에, 공허한 미래를 설계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생존 문제가 목을 조여 오는 상황에, "너도 열심히 하면 위대함을 쟁취할 수 있어"라며 우리들의 열정을 착취한다. "젊다면 패기를 지녀", "도전 정신이 있어야지", "세세한 스펙 채우기에 급급하지 말고, 더 큰 꿈을 지녀봐"(p.26) 등의 언질은 이미 익숙하다.
그러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마땅한 경험도 없는 고등학생 때부터 대입을 위해 이미 완결된 진로 계획을 지녀야 한다. 대학 가서 꿈을 찾으라는 말은 너무나도 공허하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취업 가능한 꿈'이 전부이다. 꿈마저 선택이 아니라 평가 항목이 된다. 대학이 취업사관학교가 된 지는 이미 오래. 서로가 각자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이어가야 한다. 시간이 지나 삶이 각박하다고 불평하더라도, 이들에게 돌아오는 핀잔은 "네가 좋아서 그 길을 선택했잖아"라는 내용의 것이다. 진정한 꿈을 탐색할 기회도 주지 않아 놓고.
따라서 세연이 보기에 표백 세대의 대다수는 사회 유지를 위한 소모성 부품이 된다. 간혹, 도전 정신을 무르지 않고 기어코 미개척지를 발견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소수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결국 기성세대에게 빼앗긴다.
참고로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이러한 세연의 주장들에 동화되는가 하면, 이게 구체성이 결여된 주장이 아닌지 의혹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잡기>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 그에 대한 구체성은 주인공 '나'가 체험하는 서사를 통해 제시해 나간다. '이 사회의 어른들'이나 '체제에 순응한 채 살아가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실제 존재할 법한 세계를 재현한다. 예를 들어 공무원 준비에 대한 부모의 인식과 수험생에 대한 자조, 대기업을 향한 선망, 기자 생활과 공무원 생활의 이면, 학벌에 대한 다수의 인식을 통해 풍부하게 세연의 주장을 조명해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세연의 잡기'와 '나의 이야기'가 그저 내용상 추리의 단서로 연결된 구성이 아니라, 세연의 주장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독자에게 체험시켜 주는 구성을 지니게 된다.
아래 내용은 작품 속 ‘자살 선언’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이 아닌, 그 논리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정리입니다.
세연에게 이 세대는 불행하다. 문제는 불행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불행을 가린 채 ‘더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는 데 있다. 위대해질 수 없는데 위대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모순, 그 모순이 표백 세대를 끝없이 달리게 만든다. 표백 세대의 삶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있는 힘껏 달려야(붉은 여왕 효과)" 하는 삶과 같다. (위의 세대 규정론을 요약해보았다.)
이러한 세연의 세대 규정론은, 따라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암시한다. 그녀는 너무 완벽해보이는 새하얀 세상,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 큰 얼룩을 남기기로 결정한다. 그것도 치명적이고 극단적이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 수단은 '자살'이었다.
세연의 자살 동기 및 실행 방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통념과 구별된다. 우선 자살의 최종 목적이다(자살에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소 생소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 행위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째는 '담대한' 결단으로 개인이 지닌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 둘 째는 그들을 억압하던 사회에 충격과 공포를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데, 그들의 자살이 사회적으로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생활의 압박에 쫓기거나, 크나큰 좌절을 겪는 등의 상황 속에서 자살을 실행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둘 째의 목적을 함께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살 자체는 사회에 충격을 선사할 수 있지만, 여기서 바라는 충격은 그 성격이 다르다. 세연이 바라는 충격과 공포란, 이 완벽한 사회 속에서,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주는 그것이다.
자살 선언에 동참하는 자는 사회가 꾸며낸 완벽 속 모순을 인지하는 사람이다. 또한 세연이 말하는 감정적 측면, 즉 '좌절'을 겪어본 적이 있으며, 그녀의 세대 규정론에 공감하는 사람이다. 본인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에 잘 동화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세우며, 훗날 세연의 주장을 전파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이런 계획은, 그녀 자신이 가장 먼저 실행한다. 이후 그녀가 선택한 후계, 재벌가 장남 선우, 세연의 고교 동창 추윤영, '나'의 대학 동기 오병권이 잇따라 계획(자살)에 동참하면서, 사후에 세연의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되어간다. 여기서도 계획 실행 당시, 그들의 처지가 불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재벌가 회장의 장남, 세연은 삼성전자 특채 직후, 병권은 공인회계사 합격 직후 등), 또 이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사회에 성공적으로 '전파'했다는 점에서 세연의 소기 목표는 나름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선언이 지닌 의의를 살펴보자. 첫 째, 내가 소모되기 전에 내가 사회를 먼저 포기함으로써, 개인이 지닌 존엄성과 능동성을 사수하는 것. 둘째, 현 사회 시스템이 신뢰한 이른바 '엘리트 부품'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완벽을 가장한 시스템에 이해 불가능한 '균열'을 생성하는 것.
여기까지가 세연의 극단적 선언에 대한 나의 분석이다. 사람마다 미묘한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큰 의미에서는 허용 가능한 범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단순하게 요약하자. 첫 째, '나는 사회에 저항했으니 존엄하다'. 둘째, '나는 도피한 적이 없으니 딴소리하지 말라, 즉 문제가 있는 것은 이 사회이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회에 메세지를 전달할 수단이 꼭 '자살'이어야 했는가? 그녀가 보았을 때 자살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우선 이 세대는 '표백 세대'이다. 그들이 완성된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여기서 유의미하다는 것은,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킬 만큼의 충격을 선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녀도 이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다만 나는 당신들이 '자살 선언'의 대안으로 길거리에서 플래시몹을 하거나 서명운동을 벌이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 글을 올리는 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년 연대니 청년 노조니 하는 단체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별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데 더해, 무엇보다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 p.182
'별 효과가 없으리라'는 단정은, 표백 세대의 특성으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당장의 삶에 압박, 보이지 않는 미래와도 싸워야 하며, 이데올로기 내에서 본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이러한 세대의 대다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연대하는 것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 설령 그것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고가 기존의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 등이 장애가 된다. 즉 무언가 혁신적인 대안이 있었다면 진작에 나왔을 것. 이러한 상황을 소설 속 세연은 이렇게 빗댄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다."
'자살', 본인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앞서 한 생명체로서 이해가 힘들고, 굉장히 큰 반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그 실행 주체가 전문가가 분석하기에도 여느 다수와 별 차이가 없는 환경과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었다면, 기이함이 배가 된다. 이러한 유형의 자살은 애초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번개같이 빠르고 위협적이다(p.182)". 이 선언에 사회적 파급력까지 받쳐준다면, 이보다 더 효과적이고 충격적인 저항 방법은 없을 것이다.
세연의 주장은 타당한가?
위에서는 세연의 시선에 중심을 두어 글을 이어갔다면,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다. 나는 그녀의 주장과 가치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소설의 형식은 크게 '세연의 잡기'와 '주인공 [나]의 일화'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세연과 '나'의 가치관 대립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즉, '나'는 세연의 주장이 터무니 없고, 극단적이고, 유치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녀의 주장대로 살아가고 있는 본인의 모습과 그녀에게 반박할 만한 명확한 논리를 찾지 못해 답답해 한다. 본인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가치관이 정말 잘못되었던 것인가하는, 기존의 믿음에 대한 불신이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싹트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세연의 주장과 인간으로서의 '세연'이 지닌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세연과 다른 '나'만의 의미를 찾을 것을 예고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처음에는 소설의 결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연의 주장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보여도, 그녀의 말이 틀렸나? 라고 되물으면 그 이유를 스스로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작가가 명확하게 제시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내 삶의 이유를 타자에게 의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답을 제시하지 않았고, 방향만 제시했다.
소설 속 '나'의 모습은 곧 책을 읽는 독자의 모습. 그녀의 주장을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모순을 인지하기도 하고, 그녀의 허점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결국 독자 스스로의 의미를 창조해나간다. 만약 소설의 결말 뒷부분에 세연의 주장에 대한 정갈한 반박문을 제시하면, 그 나름대로의 독단이 될 수 있을 뿐더러, 또한 반박문이 모든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감상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럼 도대체 왜 사는가' 하는, 진부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도록 만든다. "생각하기 귀찮다. 그런 질문이 왜 필요한가? 그냥 사는 것 아닌가?"라는 의견은 이 책을 읽은 이후로는 이제 관심 대상에서 벗어난다. 귀찮아도 해야만 한다. 남들이 보기에 지루해 보여도, 내 실존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세연의 주장에 굴복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이 선다.
위대한 과업을 이뤄야만 위대한 사람인가?
세연의 주장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본인 만의 가치 체계 속(세대 규정론)에 갇혀, 그 내부에서만 참인 논증을 보이는 데에 있다. 전제 자체가 참/거짓 여부를 따지기에 어려운 진술이다. 주관적 가치가 개입된 영역이기에, 사람마다 인정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같이 원만한 합의가 안 된 상태에서, 그녀는 전제가 참이라고 가정하고 가장 개연성 있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논증에 반박하기가 힘들어지는데, 애초에 '반박하기 힘든'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연의 기막힌 설계는, 그녀의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이러한 논증이 있다는 것을 공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지, 모두가 동참할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가 어리석다는 주장, 너무 비관적이고 꽉 막힌 주장이라고 어렴풋이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여타 해석에도 불구하고, 세연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만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다(잡기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역할은, 그녀의 주장에 대한 답이 필요한 이들에게 내 나름대로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먼저 전파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러한 독서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이에 대한 선인들의 견해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견해도 들어봐야 한다. 다른 소설 속 인물들에게도 물어야 한다. 내게도 물어야 한다. 다음 글을 통해 세연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단순 '형식' 측면의 분석을 넘어, '내용' 측면에서도 보여보겠다.
나는 위대한 과업의 부재가, 위대한 삶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