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배반의 여름>
'성장'의 정의는 맥락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정신적 성장도 마찬가지. 단일한 정의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번에 내가 다루어 보고 싶은 주제는 바로 그 정신적 성장에 관한 것이다. 나 또한 현재 정신적 성장기를 지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관련된 소설을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남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또는 '성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가'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다.
삶은 우리를 배반한다. 우리는 그 배반을 통해 성장한다.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성장의 여러 요건 중 하나는 가치관의 변화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수록된 유명한 문장,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처럼, 기존의 상태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낡은 세계로부터의 탈피가 필요하다. 낡은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바로 가치관의 변화, 가치관의 재편을 의미한다. 과거에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심의 망치질을 하는 과정, 그것이 성장의 핵심이다.
이러한 종류의 성장은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일어난다. 수많은 사건들이 우리 삶의 총체를 구성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해석하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수정해 나간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의미가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흐릿할 때가 많다. 기존의 관념이 지닌 관성이 매우 강력한 탓에, 사건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지닌 관성은 강하다. 그러나 종종 '삶의 배반'이 그 힘을 쉽게 무너뜨릴 때가 있다. 가치관의 변화와 수정이란 생각보다 사소한 계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예시로 들어보고자 한다. 대중교통의 임산부석에 대한 생각이었다. 꽤 최근까지 나는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석에만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이 '비효율적'이라고 여겼다. '임산부가 나타나면 그때 양보하면 되는 것 아닌가'하는 나름의 비판적 의식과 함께, 막상 의식을 행동에 옮기려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할 용기가 부족해 괜스레 옹졸해지는 마음이 공존했었다. 나의 이러한 소시민적인 모습이 여간 아니꼽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냉소와 동시에,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사회에 대한 비난을 마음속에 품었다는 표현이 알맞을까. '표현만' 보았을 때에는 마치 내가 21세기 깨어있는 인간인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 당시의 나는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했었나 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삶이라는 것은, 전혀 관련 없는 시간대에, 그것도 우연히, 내게 이전까지의 생각이 너무나 좁은 사고 속에 갇혀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이 사안에 대해서 빼먹은 부분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약자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닌, '약자를' 지켜보는 입장에 너무나도 큰 비중을 둔 나머지, 다수의 '불편함'에만 치중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산부석의 자리를 비워두는 데에는 행정적 규정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역지사지'이다. 꼭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약자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양보를 구하는 일이란 실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타인이 편리함을 누릴 권리를 대가 없이 빌려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신 초기에는 임산부임을 표면적으로 알아차리기 힘들지도 않은가. 임산부석과 관련된 대중적인 논의가 어떠하든 간에, 적어도 그 좌석을 '비워두자'는 그 정신만큼은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조용한 배려였다.
물론 나는 현행 임산부석 제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 분석한 의견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 견해는 충분히 타당하며 무시받아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견은, 후에 적극 반영하여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될 일. 남은 것은 단순히 나 자신 스스로가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부끄러운 과거뿐이다. 결국 나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상황 속에 있었던 것.
다시 말하지만, 성장이란 너무나 다양한 맥락에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적어 내려간 예시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성장의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났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배반'이란, 위와 같이 문득 떠오른 고민이나 생각 거리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삶의 배반'은 '삶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우연'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 우연이 지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적 성찰을 거치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것이 성장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이런 의미의 성장을 다루는 소설,
박완서의 <배반(背叛)의 여름>이다.
약 20페이지 남짓한 이 소설은, 그 짧은 분량에서 세 가지 삶의 배반을 압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첫 번째는 유년기 동생의 죽음과 맞닿아 있는 트라우마, 두 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 세 번째는 고결한 우상으로 삼았던 인물에 대한 존경이다. 배반(背叛)이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돌아선다는 사전적 정의를 지니고 있으나, 이 글과 소설의 맥락에서 풀이한다면 '절대적' 혹은 '이상적'이라고 여겼던 가치관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배반은 어린 시절에 일어난다. 동생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물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주인공을 수영장에 그대로 떠민다. 그는 자신의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물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생각보다 깊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본인의 발로 똑똑히 서 있다는 그 사실이, 과거에는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공포를 무너뜨리는 순간이다. 이는 곧 '공포'로부터의 배반, 낡은 관념의 붕괴다. 이러한 배반의 사이클을 두 번 더 반복하는 서사를 지닌 소설이다.
두 번째 배반과 세 번째 배반까지, 각 배반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개입한다. 이는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방식이 다소 기묘하다. 주인공이 믿고 신뢰하던 세계가 하나하나씩 깨져나갈 때마다, '아버지'는 "낄낄낄"하고 웃으며 좁고 편협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을 조롱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은 (적어도 나의 이해에 따르면) 주인공에게 '부끄러움'이라는 동력을 제시하여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당위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의미는(위의 나의 주장에서 언급했듯) 삶의 사건, 우연, 혹은 자신을 자극하는 내면의 목소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외부에서 찾던 진정한 늠름함, 진정한 남아다움을
앞으론 내 내부에서 키우지 않는 한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채
다만 허우적거림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반의 여름>-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라는 소설에서의 구절을 인용한다면,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라는 구절 역시 소설의 줄거리와 일맥상통한다. 삶의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의미를 해석한다. <배반의 여름>에서도 마찬가지. 수영장에 떠밀린 사건, 아버지의 일터 방문(두 번째 배반), 그리고 마지막 방 사건까지(세 번째 배반) 결국 삶이 주인공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덧붙여 내가 당신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적 성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 성숙은 반드시 내면을 거쳐야만 한다. 외부 세계가 지닌 광활함 만큼, 인간의 내면 또한 광활하다는 의미에서 '내면세계'라는 의미가 붙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 내면세계를 탐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고 느낀다. 이는 극단적 의미의 혐오부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향한 미세한 배척 심리라는 사소한 의미의 혐오까지 포괄한다.
각종 대중 매체의 영상들, 그 영상들에 달리는 댓글들까지. 우리는 흔히 자극적인 내용들을 접한다. 자극적인 표현과 타인에 대한 무심한 공격. 온라인상에서 타인의 감정이란, 그들의 댓글 작성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본인의 감정을 그저 지르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뿐이다. 논지에 대해 본인의 합리적인 의견을 전개하고, 남을 설득하려는 태도를 보기 힘들다. 합리적 비판과 무지성 비난 사이의 간극을 오해한 결과인 것인가. 이러한 태도가 작금의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성찰의 중요성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의 내면세계를 탐험해야 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할까?'
'나는 왜 이 사람을 싫어할까?'
'이 사람을 비난하는 나의 언행이 정말 타당할까?'
'내가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지는 않을까?' 등등
그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왔던 우리에게 재점검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을 던질 기회라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삶에 대한 이해와 분석, 섬세한 관찰로부터 얻을 수 있다.
나는 완전한 성숙을 이룬 인격체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어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한 청년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성숙의 방법론만은 타당하다는 확신을 품고 있기에, 그 믿음 덕분에 나는 당당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삶의 수많은 장면 속에서 크고 작은 배반을 마주한다. 믿어온 세계가 흔들릴 때, 그 균열을 외면할 수도 있고, 혹은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성장은 늘 후자의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박완서의 <배반의 여름>을 조용히 권하고 싶다.
짧은 분량이지만,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미세한 징후들, 그로인해 흔들리는 주인공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에게도 자신의 삶을 이루는 그 작고 은밀한 배반들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배반이야말로 지금의 당신을 만들고 앞으로의 당신을 이끌어낼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